⟪대동운부군옥⟫을 보내기 전
요즘 보고 있는 책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다. 이번 차수에 무슨 책 맡았냐고 누가 물어보면 “나 이번에 그거, 대동 어쩌구 받았어.”라고 할 정도로 익숙치 않은 서명이었다. 책이 유명하지 않은게 아니라 내 식견이 얕은 탓이다.
서명에 “대동(大東)”, “해동(海東)”, “동(東)”이 있으면 중국에서 이미 발간된 서적의 형태를 본떠 조선식으로 만든 경우가 많다. 《대동운부군옥》 역시 중국 원나라에서 간행된 《운부군옥》이라는 책의 형식을 빌려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편찬한 일종의 인물역사일화집이다. 형식만 빌렸을 뿐 내용은 모두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와 지리서, 그리고 이규보, 김시습, 남효온, 김종직 등 조선 전기 내로라 하는 문인들의 글이 담겨있다.
이 책은 시문을 짓는데 도움을 주고자 운자(韻字)에 따라 그 내용을 분류해 놓았는데, 그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좋은 시구 뿐만 아니라 교훈이 될 만한 역사 사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도 많다.
또한 사실적인 이야기들 사이에 종종 기이한 설화도 눈에 띈다. “대나무잎을 귀에 건 기이한 병사들[珥竹異兵]”도 재밌게 읽은 항목으로 《삼국유사》〈기이(紀異)〉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갑자기 ‘대나무잎을 귀에 건 병사들[珥竹葉]’이 나타나 도움을 주고 사라졌는데, 선대왕이었던 미추왕의 무덤 앞에 대나무잎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고서야 선왕이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도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부른다. 대나무잎을 귀에 걸고 홀연히 나타났다는 병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지,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라 기억에 남았다.
효자 이야기 중에는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부모의 시신을 되찾아온 사례가 많아 당시 호환(虎患)으로 인한 피해를 짐작케 한다. 한 겨울에 병든 부모의 약재를 구할 수 없어 통곡하자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개구리가 몸소 약탕기 안으로 뛰어들고, 물고기가 얼음을 뚫고 솟아오르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는 반면, 평소 어미를 때리던 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불효자 지탄 일화도 실려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의 방아타령[碓樂] 일화도 읽으면서 피식 웃음이 났었다. 백결(百結)이라는 뜻은 옷을 백 번 기워 입었다는 뜻으로 집이 매우 가난했기에 붙은 호칭이다. 연말에 이웃에서 곡식 찧는 소리가 나자 부인이 한탄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찧고 있는데 우리만 없으니, 어떻게 해를 난답니까.[人皆有粟舂之, 我獨無焉, 何以卒歲?]” 여기서 올바른 남편의 자세는? 요즘 정서로야 아내가 말을 마치기 전에 후다닥 달려나가 뭐라도 구해오려고 애를 써야 할테지만, 역사서에 길이 남으려면 이런 평범한 가장이어서는 안된다. 백결선생께서는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있는 것이오.[死生有命, 富貴在天.]”라는 《논어》에도 나오는 명구를 한 번 읊어주고는, 아내를 위로해 준다며 거문고로 뚱땅뚱땅 절굿공이 소리를 흉내내며 연주를 했다. 지금은 실전되었지만 신라 향악 중의 하나로 알려진 방아타령[碓樂]의 기원이 되는 일화이다. 나 같으면 거문고로 절굿공이 소리를 뚱땅거리는 것을 듣자마자 열불이 나서 빗자루를 집어들고 등짝을 때렸을 것 같은데, 연주가 완성되어 곡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보면 백결 선생의 부인은 인내심과 포용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나보다.
오싹한 이야기도 하나 있다. 《고려사》에 나온 일화인데 〈세가(世家)〉에 실린 기사라 실제 있었던 일에 기반하였을 법하다. 한천군(漢川君) 왕규(王睽)의 가족들이 벼락을 맞아서 몸져 누워 있을 때였다. 벼락맞은 집안의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당시에 있었던 모양이다. 도성 사람들이 이 집에 몰려들어와 가축, 재물, 그릇 등을 털어가고 기왓장 마저 들고 갔다. 기함할 만한 일은 그 다음이다. 들고 갈만한 물건이 다 떨어지자 ‘물건’을 ‘신체의 일부’까지 확장시킨 잔인하고 창의적인 사람들은 탐욕스럽게도 아직 숨이 붙어 있던 그 집안 식구들의 신체 일부를 저며가고야 말았다.[至臠其支體而去] 당시에도 보통 사건은 아니었던지 조정이 나서서 훔쳐갔던 재산을 조사하여 친족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처음 이 항목을 봤을 때는 사람들이 어쩜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싶었는데, 또 한편으로 왕규가 평소에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왕규라는 인물의 됨됨이에 대해서 역사서에 전해진 얘기가 없으니 전후 상황은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대동운부군옥》과 약속된 만남은 이번 달 까지이다. 원고를 정리해 제출하고 나면 다음 달은 또 다른 책과 씨름을 시작하겠지. 이 책을 떠나보내기 전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들을 이렇게 짧게나마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