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에 새긴 명문〔鋤銘〕
직접 가서 사 본 기억은 없지만 논밭을 가꾸는 곳에만 가면 항상 볼 수 있었던 그 흔한 호미가 아마존(Amazon.com)에서 잘 팔리고 있다.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으로 가벼우면서도 잡았을 때 균형감이 좋고 잡초 뽑기(weeding), 묘목 심기(planting), 씨앗 심기(seeding), 뿌리열매 수확하기(harvesting ) 등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만능 도구라는 평을 받으며 정원을 가꾸는 용품들 중에서도 인기 제품으로 자리잡았는데, 그 시작은 영주대장간 석노기 장인께서 만드신 호미를 누군가 아마존에서 팔기 시작하면서였다고하니 장인께서는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해지고 있음을 몸소 느끼고 계실 듯 하다. 조만간 코스트코에도 입점 될 예정이라고 하니 'Handmade Korean Hand Plow Hoe/Ho-Mi'의 세계 진출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미국 사람들은 이제야 호미의 편리함을 접하게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초용 도구로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삼국시대 말기 7세기 무렵의 출토 유물에서 현재의 호미와 비슷한 모양의 농기구가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상 잡초가 많이 나면 수확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김매기를 통한 잡초 제거가 필수인데 호미는 바로 이를 위해 최적화 된 도구다. 땅을 파내어 잡초를 뽑는 도구야 각 나라마다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쓰임새가 많다보니 더욱 편리하게 발전되어 왔을 것이다.
한편 편리한 도구를 만들려 애썼다는 것은 이 도구를 쓰는 일이 불편하고 힘든 일이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뙤약볕 아래서 구부리고 앉아 잡초와 씨름하는 일은 힘들지만 늘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테니 여름철 제초작업을 마무리 할 시점이 되면 마을단위로 날짜를 정해서 더이상 호미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뻐하는 잔치를 열었다. 다 쓴 호미를 씻으며 벌이는 이 잔치를 '호미씻이(洗鋤)' 라고 불렀는데 조선 중기의 학자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에 이런 호미씻이의 신명나는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농가에서 김매는 일을 다 끝내고 나서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먹고 마시는 것을 호미씻이[洗鋤]라고 하는데, 내가 시골에 살면서 그 일을 눈으로 확인했기에 이를 시로 기록하였다.
農家耘事已畢。老少男婦聚飮。謂之洗鋤。余田居目擊其事而記以詩。
(중략)
청년들 술잔 돌리니 노인들 거나해져 / 少年行酒長老醉
짧은 옷 소매로 일어나서 춤도 절로 덩실덩실 / 短袖起舞何蹲蹲
일 년 내내 고된 농사 이 날 하루 즐거움 / 一年作苦一日歡
농촌 들녘 오늘만은 모든 근심 잊으리라 / 田家此夕百憂寬
(후략)
농가에서 쓰이는 물건이지만 늘상 접하는 물건이다 보니 문인들에게 시상(詩想)을 떠올리게도 했던 모양이다. 조선전기 문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문집인 《금계집(錦溪集)》에 <호미에 새긴 명문(鋤銘)> 이라는 글이 실려있다.
명문(銘文)이란 주로 금속이나 돌로 된 기물에 새기는 글의 한 종류인데 유명한 글로는 고대 중국 은나라의 탕(湯)임금이 씻기 위해 쓰던 그릇인 반(盤)에 새긴 반명(盤銘)이 있다. 한 번쯤 들어봤을 '일신우일신', 즉 '진실로 하루라도 새로워질 수 있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가 이러한 명문 중의 하나이다. 원래는 물건에 새기기 위한 글이었지만 꼭 새기지 않더라도 좌우명(座右銘)처럼 자신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의 글로 바뀌어 왔으며, 아마 이 호미에 새긴 명문도 호미에 새기기엔 글이 길기도 하거니와 과거급제를 한 양반이 호미를 들고 김매기를 하며 늘상 보려던 목적은 아니었을테고 그저 호미라는 물건에서 시상을 빌어와 글을 적었으리라.
하늘과 땅의 순수하고 강한 정기가 / 惟天地純剛之正氣
혹 물건에 모이고/ 或鍾於物
태백성이 형주 신야에 정기를 모아 / 伊太白聚精於荊野
펄펄 뛰는 쇳물이 바탕을 이루었네/ 躍冶成質
쇠도끼 만들어 간신의 머리를 베고 / 爲鐵鉞以斬侫臣
칼과 창을 만들어 도적을 처벌했네 / 鑄劍戟以誅暴客
글의 첫 부분(惟天地純剛之正氣 或鍾於物)은 송나라 석개(石介,1003~1043)가 요망한 뱀을 쳐 죽인 홀(笏)에 대해서 쓴 글인〈격사홀명(擊蛇笏銘)〉에 나온 문구인데 세상의 뛰어난 정기는 사라지지 않고 시대에 따라 물건이나 혹은 사람에 모여 뛰어난 일을 해 낸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그 의미를 가지고 와 그저 광석으로 있을 때는 한덩이의 철에 불과하지만 태백성(太白星)의 정기를 모아 주조하여 쇠도끼와 칼을 만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영험한 물건이 되기도 한다는 내용으로 긴 명문의 시작을 열었다.
호미 또한 잡초를 김매는 이로운 도구이니 / 鋤亦爲薅草之利器
농사에 책훈 되었네 / 策勳田作
책훈(策勳)은 공훈이 있는 사람을 기록하고 그에 맞는 상을 주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 받게 된다. 호미도 농사일에 있어서는 책훈(策勳)이 되고도 남을 큰 공이 있다고 치켜세워주고 있다.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니 / 惡莠恐其亂苗
구별하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하네 / 盡力於區別
잡초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다시 나니 / 草不去根則復生
근본에 힘써 악을 제거해야 하네 / 務本於除惡
첫 문장은(惡莠 恐其亂苗也) 《맹자》〈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내용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바른 듯 하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위선자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가라지(피)는 벼와 비슷하게 생겨서 서툰 농사꾼은 가라지를 솎아내다가 자칫 멀쩡한 벼도 뽑아내기 십상이니 그 둘을 잘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도 밖으로는 위선자를 잘 가려내야 하고, 안으로도 나를 해치는 나쁜 생각을 잘 구별하여 없애야 함을 경계하고 있으니 호미질이 필요한 것은 논밭 뿐만이 아닌 것이다.
싹이 틀 때에 꺾어야 하니 / 當折於句萌
덩굴이 뻗으면 힘쓰기가 쉽지 않네 / 蔓則未易爲力
호미 끝을 돌려 거꾸로 쓰면 / 反鋒而倒施
곡식을 거둘 수 없으리 / 越其罔有黍稷
마지막 구절(越其罔有黍稷)은《서경》〈반경 상(盤庚上)〉에서 인용한 구절로 게으른 농부가 일을 하지 않으면 거둘 곡식이 없다는 내용으로 호미질을 하더라도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도구도 용도에 맞게 잘 써야 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일단 잡초를 구별해 낼 수 있게 되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제때 하는 것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것 처럼 초반에 작게 싹튼 악한 마음은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점점 없애기 힘들 정도로 자라나기 마련이다.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5분만 더', '5분만 더'를 반복하며 뒹구는 것도 제때 나태한 마음을 없애지 못하고 알람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뛰쳐나오는 결단력이 부족해서 생긴 큰도둑질이렸다.
사물의 이치에 항상 똑같음은 없기에 / 物理兮靡常
난초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가시나무가 뽑히기 어렵네 / 蘭不榮而荊難拔
저 천한 농장의 일꾼은 / 彼哉賤場師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를 제거하고 가시나무를 기르네 / 去梧檟而養樲棘
사물의 이치가 일정하지 않다는 말은 얼핏 들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연이란 항상 일정한 법칙대로 흘러가기에 위대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여기서의 상(常)은 변하지 않는 일정한 상태를 말한 것으로 미상(靡常)이란 항상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는 않음을 말한 것이다. 자연은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꽃이 필 때가 있으면 떨어질 때도 있는 것 처럼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고 늘 변화가 있다. 좋은 것은 항상 있고 나쁜 것은 항상 없다면 좋으련만 보기 좋은 난초라고 해서 항상 잘 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쓸모 없는 가시나무라고 해도 무성하게 자라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힘써 구별하여 제거하지 않으면 난초는 죽고 가시나무만 무성한 정원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나무이고 가시나무(樲棘, 작은 대추나무)는 좋은 재목이 아니어서 좋고 나쁨에 대한 비유로 많이 쓰인다.
간사함과 바름은 예로부터 서로 사라지고 자라왔으니 / 邪正之自古消長
이치는 길러줌에 절하지 않으리 / 理不拜育
이 문단의 첫 문장은(邪正之自古消長) 윗 문단의 첫 문장(物理兮靡常)과 맥을 같이 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물이 변하는 것 처럼 간사함과 바름(邪正)도 옛날 부터 지금까지 어느 한 쪽이 항상 우세한 것이 아니라 양쪽이 서로 차고 기울어지는 변화가 계속되어 왔다. 절하지 않는다(不拜)는 것은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거나 혹은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니, 이치(理)가 길러줌(育)에 절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치(理)가 길러줌(育)보다 우위에 있어서 바름(正)을 제대로 기르지(育) 못하면, 사라지고 자라는(消長)의 이치(理)에 따라 혹여 간사함이 더 자랄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진실을 어지럽히는 비슷한 것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 不早去似是之亂眞
재앙이 가정과 나라에 뻗을 것이니 / 禍延家國
언뜻 듣기에 외래어 같은 사이비(似而非)는 한자어이다. 겉으로는 비슷(似)하지만(而) 속은 틀린(非) 것을 사이비라고 하는데, 이 글에서는 조금 바꿔서 '옳은 것과 비슷하다(似是)' 라고 썼다. 가라지와 벼를 잘 구분해야 하듯 그저 비슷하기만 한 것과 진짜 옳은 것(眞)을 잘 구분하는 것은 그 차이가 클 때는 어려움이 없지만 비슷함(似)이 클 수록 해악은 크지만 구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공자는 《논어》속에서 이런 분별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종종 강조하셨는데,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않는 반면에, 소인은 부화뇌동만 할 뿐 화합하지는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는 글도 그 중 하나이다. 주변 사람들과 화합(和)하는 것과 함께(同)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는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의(義)와 리(利) 사이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단련된 명철함이 필요하다.
호미 자루의 쓰임을 신중히 하여 / 愼爾柄用
심어진 것은 길러 주고 기울어진 것은 엎어 버리게나 / 栽者培而傾者覆
마지막 절(栽者培而傾者覆)은 《중용장구》 에 나오는 “하늘이 만물을 낼 때에 반드시 그 재질에 따라 도탑게 해 준다. 그러므로 뿌리가 잘 박힌 것을 북돋워 주고 기운 것을 엎어 버린다.〔天之生物 必因其材而篤焉 故栽者培之 傾者覆之〕” 글에서 인용하였다. 처음 이 글을 봤을 때 기운 것을 바로 세워주지 않고 엎어버린다는(傾者覆之)내용이 너무 매몰차 보여, 뭔가 좋은 이야기가 가득한 경서(經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후 공부를 통해서 결국 이 부분도 위에 나왔던 사물의 이치가 변화하는 것(物理兮靡常)과 같은 선상에 있음을 알게 되긴 했지만 무심한 대자연에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역시 글짓는 선비는 다르다. 단순한 호미질을 통해서도 자신을 경계하는 글 뿐 아니라 자연의 이치까지도 아우르는 통찰을 할 수 있다니. 2021년을 살고 있는 나는 귀농을 하지 않는 이상 논밭에 나가서 직접 호미질을 할 일은 없겠지만 가상의 호미질을 통해 마음의 밭에서 가라지를 솎아내고 바른 마음을 잘 길러내다보면 500여년 전 대청에 앉아 글을 짓던 선비와 마음이 통하는 찰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