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ld Town Busan

제1회 부산 국제 락 페스티벌 (2000년)

나의 첫번째 락 페스티벌 이야기

by 감운장

요 몇년간 락 페스티벌을 가지 않았다. 마지막이 언제지... 서태지를 보러간 2015년의 여름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 아닌가 싶다. 아 정말 뺀질나게 다녔다. 2019년에도 안갈듯 싶다만, 예전의 기억을 꺼내고 싶어진다.


내가 본 첫 공연은 중학교 3학년 겨울. 1999년 말의 일이다. 내 옆자리에 있는 아이는 크라잉넛의 팬이었고, 1집 앨범 '말달리자'를 CD로 갖고 있었다. 그는 틈만나면 크라잉넛을 예찬했다. 삐삐의 컬러링 음악은 '펑크걸'이었다. 사실 난 크라잉넛에 큰 관심이 없었다. 크라잉넛이고, 펑크고 락이고 자시고 뭐고.


2집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 발매되었다. 부산 동의대 체육관(내기억이 맞다면..) 에서 발매 기념 콘서트를 했다. 아마 내 짝이 가자고 했겠지? 내 인생 처음으로 본 락공연이었다. 슬램문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맨 앞에서 슬램을 하던 내 짝은 몇 곡이 끝나자 뒤로 튕겨나와서 벤치에 드러누워서 체육관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계속 서서 봤던 것 같다. 슬램을 했을까. 지금이 2019년이니 제대로 기억이 날리가 없다. 돌아가는 길에 내 짝은 흥이 났는지 레코드점에 들러 RATM의 1집과 2집을 CD로 샀고 (1999년은 RATM의 3집 게릴라 라디오가 나오기 전이었다). 당시 CD가 없던 나에게 테이프로 녹음을 해줬다. 내 짝은 RATM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나는 RATM을 거쳐 Limp Bizkit Korn 메탈리카 등 좀더 하드한걸 '찾아서' 듣기 시작했다. 크라잉넛 공연이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세기말이 끝나고, 밀레니엄시대가 도래했다. 2000년의 어느 여름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뙤약볕 밑에 내가 서 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오면서 나는 '드럭'으로 상징되는 홍대 펑크락에 경도되었고, '펑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에 열광했다. 크라잉넛이 자주 입던 체크바지를 국제시장에 가서 사입고 펑크의 원조격인 SEX PISTOLS와 THE CLASH 의 앨범을 CD로 사서 들었다. 90년대 중반 도래 했던 NEO PUNK의 양대 산맥이었던 GREEN DAY와 THE OFFSPRING의 음악을 계속 들었다. 나는 SEX PISTOLS나 GRENN DAY 보다는 더 하드한 THE CLASH와 THE OFFSPRING을 좋아했다. 한때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THE OFFSPRING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연유로 2000년의 어느 여름날 광안리 해변에 내가 서 있다. 생수병을 바지 양쪽 뒷 주머니에 꽂고 초코바를 가방에 넣은 채. 크라잉넛이 광안리에서 공연을 했기 때문이다.


제1회부산국제락페스티벌. 그곳에 내가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올해 20회째 진행 예정이라고 한다. (으아.. 세월아..) 크라잉넛은 밤 늦게 나왔다. 하지만 나는 2시쯤에 광안리에 도착해서 사람들 틈속에 계속 서 있었다.


2018년 19회 부산 국제 락페스티벌 라인업. 크라잉넛이 여전히 있다. 그것도 헤드라이너로 !


드럭 레코드의 레이지본, CCM 멜로딕스피드메탈 그룹인 예레미를 봤던 기억이 난다. 유튜브의 시대였다면 그렇게까지 나는 열광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손쉽게 '레이지본 라이브', '예레미 라이브'라고 검색어를 입력하면 정말 다양한 버전의 라이브를 미리 접하고 갈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메일이 가장 성공한 인터넷 서비스였고, 네이버가 '카페 서비스'를 시작하면 전지현을 모델로 세웠고, 아직 천리안, 나우누리 등의 PC 통신이 있던 시기였다. 불법 MP3가 점점 어둠의 경로로 퍼지기 시작하여 간간히 누군가가 녹음한 라이브 음원을 들을 순 있었고, ITV 같은 곳에 크라잉넛이 출연해서 넋을 놓고 봤던 기억이 있다.


좋아하는 밴드의 라이브 하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지방 사람들은 더 그랬다. 부산이라 덜 했을수도..구하기 힘든 레어템을 구할때마냥 서울에서 온 밴드의 라이브를 보는 건 아주 가끔이었다. 보기가 힘든 것을 접하고, 게다가 그게 내가 좋아하는 밴드라면 감흥은 배가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산락페스티벌은 완전 무료였다. '지금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낮2시부터 밤 10시까지 생수병 두개와 초코바 몇개로 땀을 흘리고 서 있다.


요즘의 락 페스티벌과는 달리 아티스트들은 세팅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점점 시간은 뒤로 밀리고 아티스트들은 정해진 시간을 잡아 먹기 일쑤였다. 관객들의 호응에 앵콜곡을 즉흥적으로 더 부르기도 했다. 중화권에서 온 밴드는 (대만아니면 홍콩일려나.. 아니면 태국인가) 관객들이 의례적으로 외치는 앵콜에 앵콜곡을 몇곡 부르더니. 몇몇 관객의 앵콜에 또 부르고.. 너무 기쁨에 겨워 자기에들 노래를 계속 불러댔다. 여기는 자기네들 입장에선 외국이고, 처음 보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열광하고, 게다가 해변이란 말이다. 기쁘지 아니 할순 없지만, 노래는 그저 그래서 빨리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보고 싶었던 크라잉넛이 나왔다. 나는 엄청 슬램을 해댔다. 아는 노래가 나오니 따라 불러야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학업 및 학교 스트레스를 음악듣기로 풀었고, 락페스티벌에 가서 슬램을 하면 가슴이 뻥 뚫렸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나는 더 기억에 남는다. 부산 락 페스티벌 하면 떠오르는 첫번째 정경.


광안리에서 집이 있는 영도로 들어가려면 부산역에서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했다. 일본 락 밴드 SIAM SHADE의 공연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당시 나는 고1이었고, 외박은 허락되지 않았다. 광안리에서 부산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갔는데, 부산역에서 영도로 들어가는 버스가 오지 않았다.


30번, 8번.. 내가 기다리는 영도로 가는 버스가 오지 않는다. 막차가 끊긴 모양이었다.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1시간 쯤 버스가 오길 기다렸나. 12시가 넘었고, 나랑 같이 기다리던 어떤 여자가 택시를 불러 택시를 잡아 타고 갔다. 나도 택시를 잡아탔다. 지금이라면 스마트폰으로 막차가 오나 안오나 검색을 해보고 안오면 주저 하지 않고 택시를 잡아 탔을텐데.. 돈이 없는 고등학생이었고 삐삐 조차 없었다.


"영도 청학동이요"하고 택시기사에게 말했겠지? 시간이 새벽 1시쯤 됐을까.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가 있는 모퉁이를 도는데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다. 반바지와 난닝구를 입은채. 언제 들어간다고 따로 연락을 안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서 아버지는 나와 있었던 것 같다. 왜 이렇게 늦게 왔노 혼내거나 그런거 없이. 나란히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걸었을 것이다.


무슨 대화를 나눴을가.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젠 그 골목을 아버지와 같이 걷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2년전에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뒷자석에 앉아서 엄마한테 락 페스티벌 얘기를 하다가 그때 아빠가 날 기다린다고 앞에 나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 먼가가 내 안에서 올라와 눈에 눈물이 고였고, 울음을 참느라 혼나는 줄 알았다.


이게 나의 첫번째 락 페스티벌인 제1회 국제 락 페스티벌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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