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조급해하지 않기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나의 MBTI 중 가장 뚜렷한 성향은 J다. 그것도 통제형 J.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속상하다.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특히 해외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여행 장소가 스페인이라면 더더더욱.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는 날은 스페인에서도 규모가 큰 공휴일이어서 숙소가 엄청 비쌌다. 여기에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도 들려서 첫날 숙소를 취소했다 예약했다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예약을 확정하고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1주일 전, 혹시나 해서 숙소에 예약 확인 메일을 보냈다. 숙소에서는 내 이름으로 방 4개가 예약이 되어있다고 했다. 나는 분명 2인실 2개를 예약했는데! 어느 사이트를 통해 예약이 되어있느냐고 물으니 B사 1개와 C사 1개의 예약이라고 했다. 다급히 B사에 전화를 했다. 여행 성수기라 그런지 30번은 넘게 전화를 걸고서야 B사 고객센터와 연결됐다. B사는 호텔에 연락을 해보고 다시 전화를 준다고 했다. 하루가 지난 후 B사는 자신들의 예약이 아니고 E사를 통한 예약이라는 확답을 받았다고 했다.
E라고? 나는 E사 아이디도 없는데? 다시 호텔에 연락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하루가 지나도 호텔은 답이 없었다. 영어로는 제대로 메시지가 전달이 되지 않았을까 봐 생성형 AI로 번역을 돌려서 보내기까지 했다. 하루 종일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끔 C사에서 E사에 하청을 맡겨 예약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운영시간이 되자마자 C사에 전화했다. C사 담당자는 이번에는 E사가 아닌 본인이 직접 예약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호텔에 연락해 보고 다시 메시지를 남기겠다고 했다.
이틀 동안 기다림의 시간이 흘렀다. C사는 호텔이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유명 카페에 글을 남겨보기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 타기 전날, C사는 호텔에 가까스로 연락이 됐으며 일단 C사 예약은 확정적이니 호텔에 가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호텔은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여행 당일, 중복 예약이 되었을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짰다. 호텔에서 돈을 내라고 한다, 이미 난 중복 예약의 가능성을 메일로 알렸으니 메일을 확인해 보라고 한다. 또는 일단 돈을 내고 중복 예약이 된 사이트를 찾아서 청구한다.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돌렸지만 첫날부터 불쾌한 경험을 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됐다. 찝찝한 마음을 안고 집을 나섰다.
우리는 저가 항공을 이용해서 14시간의 비행 동안 식사가 2번밖에 제공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전 라운지에서 밥을 든든히 먹고 텀블러 여러 개에 물도 담아서 비행기를 탔다.
14시간 만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호텔에 들어갔다. 우리가 마지막 숙박객인지 프런트 직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더니, "1박 동안 방 2개 맞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마자 열쇠 2개를 건네받았다. 일주일 동안 신경 썼던 호텔 문제가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 너무나 허무하게 해결됐다. 허허허... 체크인을 하니 그제야 밤 9시가 넘었고 아직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체크인을 하고 호텔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었지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속 썩었던 기간이 무색하게 도착한 첫날은 무사히 지나갔다.
다음날, 렌터카를 빌려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아웃렛에 잠시 들려 구경하고 끼니를 해결한 후 토를라-오르데사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아웃렛에서 간단히 구경하고 피자와 파스타로 점심을 먹은 후 토를라-오르데사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까지는 약 5시간이 걸리는 긴 운전이었다. 차에 타고 있으니 14시간을 타고 스페인에 왔는데 이동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 지도를 보고 있자니 우리가 가는 길 옆 유적지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발견한 곳은 Torreciudad라는 곳으로 절벽 바로 위의 성당이었다. 검색해 보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성지 순례로 많이 가는 곳이었다. Torreciudad에 가기 위해서는 왕복 1시간이 더 필요했다. 가족들도 오랜 시간 차를 타는 것이 힘들었는지 흔쾌히 동의를 했다. 청록색의 호숫가 가파른 절벽에 서 있는 Torreciudad는 인간이 종교를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였으며 황토색의 건물과 호수의 대비가 멋진 곳이었다.
Torreciudad의 풍경은 평소에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는 통제형 J의 흔치 않은 일탈로 얻을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바르셀로나를 떠난 지 약 7시간 만에 토를라-오르데사에 도착했다. 피레네산맥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토를라-오르데사는 오르데사를 트레킹 하는 베이스먼트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호텔에 차를 대고 마을을 구경했다. 한국 예능에 나와 유명한 식당에서 양고기, 오리고기, 소고기 등 다양한 요리를 먹었는데, 간이 세고 짜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오히려 식당 앞의 한적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먹은 젤라토가 더 맛있었다.
스페인에서 보낸 첫 이틀은 앞으로의 여행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조급해하지 말 것. 어차피 여행은 계획을 짠다고 해서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도, 계획이 없다고 해서 순조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스페인 여행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을 경험으로 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시간을 안 지키기 때문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어떤 외국인이든 반드시 배우게 되는 스페인 단어가 마냐나 즉, '내일'이다. 그들은 가능하다고만 생각되면, 오늘 할 일을 마냐나로 미룬다.
<카탈로니아 찬가>(민음사) 23쪽
스페인 여행을 하다 보면 한국인들은 갖지 못한, 그들의 느긋함에 감탄하기도 하고 답답해지기도 한다. 이때 조급함은 나만 불편해지게 할 뿐이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마냐나'에는 되겠지' 또는 ''마냐나'에는 더 멋진 일이 있겠지'하는 생각은 Torreciudad처럼 즐거운 여행을 위해 필수적인 태도다.
제이 가족의 여행 팁
1. 스페인에서 차를 빌릴 때에는 현지 업체를 이용해 보자. 국제적인 프랜차이즈 업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풀 커버 보험으로 차를 빌릴 수 있다.
2. 티웨이 항공을 이용할 경우에는 물병과 간식을 필수로 챙겨야 한다. 식사는 이륙 후 4시간, 착륙 4시간 전 2번 제공되며 컵에 담긴 물만 준다.
3. 티웨이 항공 이용 시 뒷자리를 타면 누워서 갈 수 있는 이른바 '눕코노미'의 확률이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