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Y - if you love me
회피형 인간은 딱히 읽지 않는 회피형 인간에 대한 글
사연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해오는 분들의 90%는 '비회피형'으로, 회피형 상대를 붙잡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이 주된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정작 회피형인 사람들은 자신이 회피형인지 어떤지에 관심이 없고 알려고 하지도 의문을 갖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본인의 회피형 자아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할 사람들이, 막상 회피형이 뭔지조차 모른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비회피형인 사람들이 아무리 숙여주고 맞춰주고 기다려주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회피할 만한 이유를 찾고 만들어내기에 도가 텄기 때문에- 요즘처럼 연애와 결혼 자체가 메리트를 잃고 시들한 취미가 된 시대에는 더더군다나, 회피형 인간들은 끝끝내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가기를 고집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이 유명해졌으면 한다. 더 많은 회피형 인간들이 읽어서 공감과 위로를 얻고, 변화의 의지를 가져갔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백 편의 글을 더 쓴다고 해도 나는 결국 앵무새처럼 똑같은 소리만 되뇔 수밖에 없다. 비회피형인 사람에게 해줄 말이라고는, '당신의 잘못으로 그 사람이 떠나가는 게 아니듯, 당신이 뭔가 한다고 해서, 혹은 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떠나가지 않을 것도 아니에요.'뿐이다. 다시 말해, '회피형인 그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라는 메시지의 무한 변주 말고는 나로서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단 것이다. 변화의 시작은 본인이 회피형임을 깨닫고 회피형 특성에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이끌지는 이후 출판될 책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회피형 인간이 자신을 읽는 방법
'너 회피형인 거 같은데? 지금 하는 행동 완전 회피형이네? '등의 접근은 자칫하면 '넌 어딘가 잘못되었고 내가 널 고칠 거야'라는 식의 연인 간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섣부른 라벨링은 회피형 인간에게 그야말로 쥐약이다. 회피형 인간이 당장 환골탈태할 수 있는 충격요법 같은 건 따로 없지만 스스로 점차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는 계기를 만들어나갈 수는 있다.
내 경우 그 계기 중 하나는 꾸준히 써 온 일기였다. 자신의 필기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밀 블로그에 노트북으로 써나가도 된다. 일기는 거울과 같아서 당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솔직하게 쓰는 것이 포인트이다. 그동안 눈치 못 챘던 자신의 모습, 이전과 비교했을 때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까지도 낱낱이 볼 수 있으려면 다소 유치해 보이더라도 마음속 말을 그대로 꾸준히, 정기적으로 적어 내려가야 한다. 다음의 솔루션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이다.
이별을 직감하는/결심하는 그 순간,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 전부터의 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신이 어느 순간에 어떤 감정들을 느꼈는지 되짚어보고 (지금 당장은 사랑한 적조차 없었던 것 같다고 느끼고 있겠지만 당신은 어느 한때 분명히 설레어했고 그 사람만을 위한 맞춤 시나리오를 열댓 개쯤 썼던 사람이다.) 어떤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인지- 무엇이 착각이고 오해였는지 등을 기억과 짜 맞춰가며 판단하고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늦지 않게 그때그때 자각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자아성찰 자체도 귀찮고 버거운지라 회피하느라 바빴던 나는, 그저 대충 나 자신이 어느 정도는 자주적이고 투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일기를 읽으며 돌이켜보니, 상대방이 어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던' 나를 알아차리지 못해서 말 못 하고 지나갔다가 찝찝해한 적이 제법 있었다. 또한 난 그런 거 '바라지 않는' 쿨한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서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만남을 억지로 유지하다가 미안함만 남긴 채 끝내야 했던 경우도 있다. 이처럼 같은 실수들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로부터 당신 스스로에 대해 배워야 한다.
매거진을 마무리하며: 후기
올해 회피형이라는 주제만으로 30편의 글을 써냈고 그 기록을 모아보니 제 속의 것들이 한 움큼은 정리가 된 기분이 들어 뿌듯합니다.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아 이제 같은 주제로 또 글을 쓰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습니다. 메일로 진행하던 무료상담 역시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유리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는 편지처럼 누군가에게 기약 없이 털어놓고 싶은 사연이 있다면 물론, 보내주셔도 좋아요. 대신 답장은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회피형 인간 101] 브런치 북과 [당신으로부터 도망치기까지] 매거진을 취합하고, [안쓰럽다면(가제)], [변해간다면(가제)], [회피형 커밍아웃, 손절 예고제(에필로그)] 등 미공개 분량의 글 두세 편을 모아서, 약 2주 후에 출판 소식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회피형 자아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묵은 흔적들, 시집과 단편소설이 전자책으로 먼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허5파6의 '여중생 A'라는 웹툰에서 작가의 본분은 '살아남아 계속 글을 써 나가는 것'이라고 하지요. 제게 있어서도 글은 평생을 두고 해치워야 할 과업이고, 여기 브런치 이 공간은 작고 소중한 숨 쉴 틈입니다. 헤어짐을 전제에 두고 말할 때 서운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이번에 여러분들과는 다시 만날 날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새로 해드릴 만한 이야기가 생겼을 때 또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