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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Aug 20. 2022

봄, 꽃샘 : Week 8

허무


뭐라도 디뎌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발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가 있던 적은 있었나? 다 걷어차고 다녔던 것 같기도. 분명 남은 인생을 통틀어 생각하면 좌절의 순간이란 정말 몇 초의 찰나밖에 되지 않을 텐데도, 꽤나 오래 망연자실한 적이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는데 이제 앞에 디딜 만한 돌이 안 보이고, 너무 멀어서 닿지 않거나 빈약해 보여서 오래 딛고 있기도 힘들 돌들만 보이는, 왠지 딱 그런 상황이었달까.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혹여 다른 곳에 길이 있을까? 주변으로 시야를 넓혀 둘러보니 무척 낯선 풍경에 선뜻 도전하기가 겁났다. 어쩐지 자신도 없고.

추켜세운다는 뜻의 '비행기 태운다'는 표현만 생각해봐도, 우리가 뭘 기대하고서 이 먼 타지까지 오는지는 자명하다. 그렇게 꿈꿔왔던 이상이 너무 클 때는 아무것도 못 되는 현실의 초라함을 마주할 때 주눅 들고 만다. 가능성이 주는 불안이란 정말 묘하다. 다들 묶여 사는데 나 혼자 갈 곳이 없다면 그걸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두가 쇠사슬을 자랑하는 세계에서는 휑한 내 발목이 볼품없이 앙상해 보이기 마련이거늘. 순진하게도 언제까지나 정해진 길대로 따라 걸을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 정작 길을 잃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하기사, 누가 계획을 하고서 길을 잃겠나.

어떤 자아에 언제 목소리를 주고 언제 또 슬그머니 뺏어야 하는지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머릿속 뇌세포들에게 감정이 있고 역할이 있다는 상상을 모티브로 나온 픽션들도 있지 않은가. 나로서 제일 큰 골칫거리라면 이른바 찡찡이 자아와 덤덤이 자아의 대결이렷다. 짜증과 불평, 초조함에 시달리다가도 에라 될 대로 되라지, 싶은 순간이 온다. 무력감과 공허함에 늘어져 있을 땐 반대로 오기와 분노가 날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살아 있으려면 돈도 건강도 친구도 있어야 해, 나부끼다 보면 없어지는데.


자아분열이 일상이다 보니, 최대한 게으름 부리고 놀다가 부랴부랴 그걸 수습하겠다고 허덕이는 나날의 지속이다. 잘 달리다가도 뚝심 있게 쭉 가지 못하고, 슬며시 누울 자리를 보고는 고꾸라지기도 한다. 어쩌다 보니 20년을 훌쩍 넘어버린 지난한 학창 세월 동안에 이런 패턴이 아주 루틴으로 굳어 버린 것이다. 극단적 라이프스타일을 오가는 건 딱히 효율적이지도 건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아와 개성을 통일해서 일관적이고 항상성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박 자체가 문제 아닐까? 그래도 무기력과 과긴장을 너무 자주 오가는 건 삼가는 게 좋지 않나?

사실 나의 가장 큰 적이란,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보상심리일 수도 있다. 물론 열심히 일하고 나서 쉬고 싶은 보상심리 자체는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다. 사람이 기계도 아니고 하다못해 기계더라도 전원 공급과 에너지 충전이 필요한 법이니. 하지만 내가 해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혹은 받는 만큼만 하겠다는 바로 그 마음가짐이 동기부여와 실천력에 있어서 양날의 검이 된다. 이 태도는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장애물이 된다는데, 내가 바로 산 증인이다. 여태까지 내게 아낌없이 주고자 하는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한 것은, 나도 몰래 계산기 두들기며 리워드 챙기느라 놓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일지도.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좀 더 공적으로, 대외적으로 혹은 커리어 위주로 교류를 하고 성취를 쌓는 개인 성향으로 인해 사적 관계에는 상대적으로 덜 전념하게 된 것이랄지. 바꿔 말하면 사적 관계에 대한 열망은 공적인 교류와 성취 경험에 투자함으로써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단 말이겠다.

다만, 당장은 믿지 않더라도 끝내 찾아 나서야 하는 게 참된 인연이리라 믿고 싶다. 닿을 수 없고 닿은 적 없어도 나아가야 한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이곳 타지에선. 비슷한 처지의 한국인 또는 이방인들로만 이루어진 좁은 소셜 사이클은 혹여나 내가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걸까 봐 초조해진다. 그렇다고 로컬인들과 부대끼는 건 뭐 쉬운가. 꿈속 사람들이 '이건 너에게만 꿈이잖아'라고 원망스럽게 소리쳤다던 어느 자각몽 일화처럼, 내가 이곳의 마음에 안 드는 점에 대해 말하면 로컬인들은 '그렇지만 난 여기서 살아야 하는데 어쩌라고?' 하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모두가 번잡한 일상이지만 그럴수록 작은 위로를 간간히 찾아나가야 한다. 어찌 됐든 한 사람씩을 굽어살피는 수호요정 같은 게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내가 제일 우울할 때마다 나타나던 까만 고양이가 나만의 요정일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서 하는 소리다. 어두운 밤에도 반짝이는 눈을 찾아 정전기가 막 이는데도 오래도록 서로를 쓰다듬었던, 그 추억이 날 버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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