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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Sep 13. 2021

봄, 꽃샘 : Week 6

해맑음의 해악

고역스럽던, 혹은 부아가 치밀던 순간들

주체적인 성적 대상화가 트렌드일 때에 유교 걸은 트월킹을 '강요'당한다. 뭐, 심각하게 하는 소리는 아니고 웃자고 종종 꺼내놓는 에피소드이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파티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친구한테 유럽 국가에서 온 친구들이 트월킹을 배우고 있었고, 단순히 춤 동작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란 건 "침대에서도 하는 거"라는 농담이 오갔기에 분명했는데, 머쓱하게 앉아 있는 내게 결국 불똥이 떨어졌다. 엉덩이 움직임이 정말 놀랍고 아름답지 않냐며, 일어서 보라고 유럽 친구들 중 한 명이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글쎄 모든 여자는 아름다우니까, 자유롭게 엉덩이를 털어줘야 된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세상.

즐기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앤가? 눈치를 주던 그 애는 사실 내 영화 취향도 잘 이해를 못 해서 날 아웃팅 시킬 뻔한 적이 있다. 새로 사귄 로컬 친구를 초대해 같이 영화를 본다기에 나는 빠지겠다고 말하고 방으로 올라가는데, '맞아 넌 영화 슬픈 거 좋아하잖아~ 게이 나오는 거~'하는 말이 뒤에서 들렸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장문의 문자로 그 친구에게 아웃팅이 뭐고 그걸 왜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줘야 했다. 젠장, 내가 레즈비언이고 레즈비언이 나오는 영화가 보통은 슬픈데 어떡해, 그리고 아직 세상은 레즈비언에게 그렇게 다정하지 않으니 아무에게나 내 정체성을 암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그 애에게서 온 답장은 '걱정 마, 아무도 너의 정체성으로 널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 :)' 같은 거였다. 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우리는 조금 다른 입장에 있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교사의 책임이고 교사의 잘못이라는 게 그 친구의 지론이었지만 나는 선생도 사람이다, 라는 의견을 고수했다. 내가 소수의 골칫거리 학생들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을 때면 스트레스받는 일이라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들을 선해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교사가 좀 더 노력하면 되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의 논리는 곧잘 손쉽게 자기 검열과 자학으로 이어지곤 했다. 본인에게 가혹하고 엄격한 사람들은 고민하는 신참을 봤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네가 뭔가를 잘못한 걸 수도 있지 않겠니, 더 잘해보렴.' 하는 말을 건넬까? 그거야말로 동료나 (특히) 상사로부터는 듣고 싶지 않은 조언 아닌가?


우리 이제는 낙담과 홀대를 멈춰 세우자.

모순된 기대를 너무도 많이 짊어지고서도 긴 세월 변하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끝까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오밀조밀 풀어나가는 아티스트가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보게 되었다는 요즘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심도 되더라. 그런데 기시감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 무명이던 시절에 언론과 방송계에서 안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경험을 털어놓다가, 사실 그런 일들이 스스로에게는 오히려 꼭 잘 되고 말겠다는 다짐의 계기가 되더라는 식의 마무리를 한 것이었다. 낙담과 홀대를 이겨낸 단단함과 현명함은 오로지 자신만의 업적으로 남겨두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잖아요, 당신이 잘 버틴 것이고 그들이 못된 것인데.

상처가 우리를 크게 하지는 않는다. 아마 우리를 깊게 만들겠지. 그러나 깊어지기 위해 상처가 필요하다고 낄낄대는 세상에 엿을 먹이는, 한을 깨우치라고 눈머는 약을 들이미는 고리타분한 수작에 침을 뱉는, 배짱과 용기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시대다. 악담에 가까운 말을 들어가면서 무시받고도 힘을 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털어놓은 일화는 분명 힘이 되는 면도 있겠다. 그러나 정신 차리랍시고 저주를 쏟아내는 치들에게도 힘을 심어준다는 게 문제다. 아무에게도 잘못이 없다는 느낌의, 모두가 듣기 좋은 말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큰 이유다. 영광의 상처를 달아주겠노라 칼을 휘두르며 설치고 다니는 작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과오를 부끄러워하시라고, 되풀이 말자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는다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단 한 명만 있어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당장의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 다른 이들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게 어른의 시야, 어른의 책임감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만큼 낮은 자리의 어린 이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여전히 탈을 쓰고 외줄 타기를 해야 하는 입장이더라도, 최소 면전에서 푸대접을 받진 않을 위치에 섰다면, 하던 대로 위를 받들기보다 아래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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