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많은김자까는 모태신앙으로 독실한 천주신자입니다만.
웬만하면 주일을 지키고,
십계명을 지키려 애쓰고,
현재 묵주의 9일기도는 116일째인데다
이미 고인이 된 울아빠의 소원이
딸 수녀되는 게 꿈이었던...그런 딸인데(그런 딸이 애가 다섯이구료. 아빠)
그렇긴 합니다만.
인간의 마음이 때론 갈대요. 때론 헬륨가스보다 가벼워서.
유혹 앞엔 바람 앞에 등불이라.
하지말라면 더 해보고 싶은.
그리스로마신화의 최초의 여인 판도라씨가
신들이 열지 말라는 데도 굳이
항아리 뚜껑을 열어, 사달을 내더만.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목적이 확실했고.
이게 핑계가 되거나 정상참작이 될 수 있을란지 모르겠습니다만, 큼큼....
나도 고3 엄마는 처음이라.
2018년 작년 일이다.
1호가 고3이요. 나 역시, 개인사 이것저것 머리아프고, 억울하다 싶은 일 몇가지가 있어서.
점집 몇군데를 다녀봤다.
그 중, 실력에 비해, '아들 대학 잘보냈기'로 소문난 동네 언니가
아주 용한 집이 있다며, 점집 한군데를 추천해줬다. 일명 '입시전문 철학관'
"너도 알잖아 우리 애 성적. 중경외시도 떨어졌는데, 그 점집 선상님이 찍어준 날짜 찍어준 시간에
딱 맞춰 원서를 넣었더니~~~~~~"
스카이에 합격했다.
솔깃해진 나는,
'입시전문'점집에 입시와 전혀 관련없는 아는 동생 몇명을 우루루 데리고 방문했다.
점집은 몹시 허름했다.
하긴 점집의 아우라가 이 정도는 돼야지.
허나, 개인정보 비밀유지 이런 건 전혀 보장도 안된 곳으로,
모기장 커텐 너머...동행한 아는동생들의 배우자 사주팔자까지도....
본의 아니게 공유됐던 바.
한마디로 그냥 아주 천기누설의 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내차례
사실, 용한 점집의 '용함'의 기준을 모르겠는 바.
뭘 물어보고, 뭘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점집 그 선상님과 마주 앉았다.
"뭐 때문에 왔어?"
-애 때문에요. 고3이에요.
"생년월일이랑 시.."
-2000년 10월 어쩌구일 저쩌구시
"문과야 이과야?"
-에이~~여기가 철학관인데, 선상님이 그 정도는 맞추셔야죠.
";;;;;;;;;;;;;;......애... 사..사...사주로 봐선............이과네 이과"
-문관디요
"올해. 수시로 가야 해 수시. 정시는 어려워. 정시는"
-그건 저도 알죠. 수시에서 거의 80% 뽑고, 정시에서 20% 뽑는데, 당연히 정시가 어렵고, 수시가 쉽죠. (사실대로 말하면, 시사작가 답게. 당시, 수시 정시 선발 비율을 쩜 몇퍼센트까지 정확히 제시했었다.)
-그래서, 대학은요? 어떤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동쪽....서쪽 안좋아"
-동쪽이면? 어떤 대학?
"고대도 있고, 서강대, 성균관대, 이대, 서울대, 외대, 경희대......"
-에? 갸들이 다 같은 방향에 있는 대학들이었어요?
"s대 가겠어. s대"
-에? s대요? 올해는 S대 못갈꺼 같은데?
"S대 간다니깐"
-하긴....S대 많죠. 서울대 서강대 성균관대 서울여대 숙명여대 상명대 서경대 삼육대 숭실대....지방대까지 합치면....
-올해 말고 내년은요?
"내년을 뭐하러 물어봐. 올해 보내. 올해. 뭘 재수를 시켜. 재수 시키지마. 한번에 보내야지"
-재수에 대한 선상님의 평소 생각말고, ㅎㅎㅎ 애 사주로 봐서, 올해에요 내년이에요?
-애가 문관데 국어를 못해서요. 수학은 잘해요.
"그럼 수학과 가면 되겠네."
-저기요. 선상님. 문과라니께?
"그럼 국문과"
-국어 못한다고요.
"아.....그러면 수학잘하는 애들이 문과엔 어떤 꽈가....있지?"
-경제 경영 통계 무역. 저 지금 입시전문철학관에 입시설명해 드리러 온 거 같네요...호호호
"허허허 ;;;;;;;;;;;;;;; 작가도 좋겠고."
-저기요 선상님...국어를 못한다고요. 국어 똥멍충이라고요. 국어 못해서 대학 못가게 생겼다고요.
"엄마 닮았으면, 아나운서도 좋겠네. 아나운서. 말도 잘하고."
-아빠 닮았어요.
"궁금한거 있음 더 물어봐."
-(짓꿎게) ㅎㅎㅎ 진짜요? 진짜 더 여쭤봐도 돼요?
";;;;;;;;;;; (못들은 척) 다른 가족 껀 안봐?"
-네. 안볼라구요. 얼마에요?
"3만원."
-근데, 복채 받으실거에요? 제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 농담이에요. 즐거웠습니다.
다음날 1호 학교서 고3 학부모를 위한 입시설명회가 있었다.
오랫만에 만난 학부형들과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데,
단연 나의 전날 철학관 방문기가 화제가 됐다.
그렇게 한창 수다를 떠는데,
아까부터 뭘 하는 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던 다른 반 엄마들이 뒤를 돌아보며.
"저......"
-네...?"
"잘들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점집 어디에요?"
"종로 어딘가...............ㅎㅎㅎ"
"그래도 중경외시 떨어질 뻔한 애, 수시 날짜 찍어줘서 스카이 붙었다면서요. 밑져야 본전이니...연락처 좀"
"ㅋㅋㅋㅋㅋ어제 갔다 오는 길에 지워서, 없어요."
그 후로도 몇번 철학관이라는 데를 갔는데,
몇년간 아이에게 학운이 깃들지 않았으나,
2019년보단 2018년이 나으니, 재수를 시키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재수 중이다.
지금도 역시나 수학실력으로는 스카이요. 국어실력으로는 서울약대 서울상대...
(참!! 요즘 애들은 이말을 모르더만요. 우리때는
서울약대='서울에서 약간 먼대학'. 서울상대='서울에서 상당히 먼대학'이었는데 ㅎㅎ)
기숙학원도 싫다. 재종(재수종합학원)도 싫다.
부족한 한두과목만 단과로, 그리고 인강(인터넷강의)으로
독학에 가까운 재수 중인데, 하필이면 골라서 간 독서실은 그 점집 바로 길건너편!! ㅎㅎ
재수를 결정한 건,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서다.
1호는 초등학교부터 고3까지. 12년간 단 한순간도 성실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학교에선 틴트며 화장품 한번 바르지 않아 본 유일한 여학생으로,
제 평생을 성실과 범생이란 수식어로 살았던 아이다.
오죽 했으면, 고1 학교 상담을 갔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엄마를 나를 보더니...."어머니는 안닮은 것 같네요."라고 했을까? ㅎㅎ
아이에겐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고, 작년엔 실패했다.
대학에 대한 아이의 눈높이는 높고,
아이는 그만큼 성실했으므로,
한번의 기회를 더 가질 자격은 넘치도록 충분하다.
서울약대든 상대든 어디가 됐든 상관없다.
아이가 만족할 수 있고, 스스로 타협 가능하다면, 대학이 어디있고, 이름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성실하게 살아온 제 인생의 보상이 대학이 아니라는 사실만 깨달을 수 있다면(시간은 걸리겠지만).
올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대학의 레벨 따위로 승리에 취하거나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