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온에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많은김자까 Sep 04. 2019

역사는 역사다! '추적 60분'의 쉼표

수화기 너머 낯선 남자는 말했다.

-검정 스타킹을 가져오세요. 신고 오시면 안되구요. 그냥 가져오셔야해요. 꼭이요

"네? 왜요?"

-가져 오시면 알아요. 신고 있는 건 재미없어요.

"......................."

-내일 오후 두시, OOO사거리 OO약국 앞에서 만나요

"네"

-인상착의는?

"키 163 마른편. 민소매 은색 니트 상의에 블랙진을 입고 갈 거에요"

-네 알겠습니다. 내일 봬요.


실전이다.

이튿날, 난 약속대로 오후 두시,

민소매 은색 니트 상의에, 블랙진을 입고

OOO사거리 OO약국 앞에 서 있었다.

썩 어울리지 않는 파우치 하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포장을 뜯지 않은 새 검정스타킹을 어딘가에 지니고.


눈에 띄진 않지만,

사거리 꼭지점마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나는 곧 있을 상황을 그려보고,

최악의 상황도 계산해봤다.


1999년. 내 나이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연애 한번 안해 본 내가, 낯선 남자와 벙개팅이라니. 민망함보다 더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전화기 너머 검정스타킹 타령을 하던 낯선 상대의 첫인상은 뜻밖이었다.

짙은 카키색 폴로티셔츠에 칼날처럼 각잡은 폴로 베이지색 바지.

한마디로 용모로는 심하게 멀쩡했고, 준수하다 못해 훤칠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는 어렸다. 20대 초반?


-가시죠

"어디........"

-여관이요

(맙소사!! 올것이 왔다)

"아...근데 제가 좀 낯을 가려서,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라도 나누고"

-네?

"근처에서 커피나 한잔 하고 가죠."

-(심드렁했고 불쾌해보였다) 제가 싫으면 싫다고 말씀하세요.

그는 커피 마시자는 나를 황당해 했지만, 황당하기로야 나만했을까?

"그게 아니고요."

나는 집요하게 설득했고, 실랑이 끝에 그는 마지못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흡사 다방같은 2층 커피숍, 꽤 넓직했고 우린 입구에서 멀지 않은 창가에 자리 잡았다.

그날 내 차림과는 아무리 봐도 덜떨어지도록 어울리지 않았던

내것 아닌 가방인지 파운치인지는

테이블 위에, 그를 향해 올려놨다.


그가 말하기를 온라인 벙개팅으로 많은 여성들을 만나봤지만,

여관이 아닌 커피숍에 들어온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도 세상 처음이다!! 뭔 컴퓨터로 키보드 뚜드리다 만나서 여관까지 가냐?!)

앳돼 보인다니, 스물 두살이라고 했다. 대학생이고 휴학중이라는 소개까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휴대전화보단 삐삐가 보편적이던 시절,

그의 삐삐는 쉴새없이 울려댔다.

벙개팅으로 새롭게 만날 여자들이거나,

만났던 여자들이라고 했다. 하루에도 여러명을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 같았다.

잠깐 삐삐 메시지를 확인하고 오겠다는 그에게,

나는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이제 여관으로 가나보다 했고,

기실 나의 임무는 거기까지 였다.


나는 그날, 취재를 나갔다.

인터넷 채팅방에서, 벙개팅 형태의

성매수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래서 당시, 우리팀 작가 모두가 동원돼

추억의 천리안 유니텔의 채팅방에 접속해 성매수자를 색출했고,

그 중 십만원에 성매수를 제안한 20대 초반의 이 남자를 만나러

내가 투입된 것이다. 카메라가 든 내것 아닌 파우치를 들고.

나는 그와 커피 마시는 것쯤으로 끝났지만,

당시 메인 선배는 다른 성매수 남자를 만나러 나가서는,

피디가 절대 안된다는 데도,

기어이 휴대전화 전원을 꺼버리고,

여관방까지 들어갔다.

아무일은 없었지만, 선배가 찍어 온 영상을 보고 난 그때 깨달았다.

왜 그 선배가 시사프로그램의 대작가며 대모인지...

우리는 당시 기자와 피디가 함께 만드는 뉴스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다.


짧은 뉴스를 구성하면서, 가짜명품백 판매자를 취재하기 위해 몰카를 들고 몇번이나 출동했고,

이동보도방, 성매매 여성을 가장해 봉고차도 탈 뻔 했다.

뭣도 모를 막내시절이기도 했지만,

그땐 사명감 반 열정 반.

난 시사프로그램의 작가였으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십분남짓 취재물도 이럴진데,

60분짜리 탐사보도프로그램이야 말해 무엇하랴.


추적 60분이 종영했다.

애많은이피디도 몇년간 몸담았던 추적 60분의 종방은 아쉽고 아쉽고 아쉽다.

남편이 추적 60분을 제작할 때,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뻗치기 취재는 다반사고,

취재하다 욕을 먹거나 아무렇게나 밀쳐지는

남편을

아이들과 방송으로 볼 땐,

이렇게까지 하고 살아야 하나...싶었다.

특정 단체에 대한 비리 부조리를 제기라도 하면,

그들끼리 연락처를 공유한 탓에

몇주 몇달을 종일 욕설과 협박 문자 전화에 시달려야 했고,

조폭도 만나고,

죽창으로 위협하는 중국어부를 만나러 중국에도 가야했다.

빽있는 냥반들의 주변을 취재하고 나면,

방송 나가기 직전까지

그 냥반이 동원한 빽들의 압박까지 전방위적으로 날아들었다.

상대가 제기한 소송에 법정에도 서야했고,

방송금지가처분 신청 결과를 기다리며

피 말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비단 남편 뿐이라, 추적 60분을 거쳐간 모든 제작진들에겐

일상과 같은 일이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 중엔,

지금은 드라마작가가 된 80년대 추적 60분 한 작가는

인신매매 취재차 나갔다 범인들에게 납치됐는데,

경찰과 제작진이 작가가 납치됐던 봉고차를 놓치는 바람에

난리가 난 적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추적 60분은 아녔지만, 최근 티비였는

유튜브 방송였는지.

한 여기자가 돈있고 빽있고 권력있는 어떤 회장님의 비리를 취재하러 갔다가

그의 충직한 비서에게

멱살을 잡혀, 주차장 바닥에 내팽겨치는 걸 봤다.

쭉 늘어진 카디건과,

헝클러진 머리카락으로 벌떡 일어나

다시 차를 따라가는 기자를 보며,

분하고 울컥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따져 묻고 싶었다.

당신도 누군가의 귀한 딸이 아니냐며....


기레기 피레기라는 지탄을 받는 요즘이다.

추적 60분 36년 역사 역시,

오로지 올곧았다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남들 다 가는 쉬운 길을 두고,

치열한 탐사보도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들에게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없었다면,

그들은 애써 그 길을 갈 이유도

갈 용기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숨겨진 사회적 비리와 불공정을

모두의 공분으로 공론화 시켜,

공정한 사회로의 한걸음을 떼게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탐사보도저널리즘이다.


어느 피딘들, 작가인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정말 좋겠네" 하는 출연자와

쎄쎄쎄~~하며 재밌고 즐겁고 시청률 많이 나오고 광고 많이 붙는

그런 방송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프로가 가치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도 즐겨본다)


몇년 전 모 홍보실 관계자와 대화 중에

추적60분, 소비자고발, 피디수*, 그것이 알고** 피디 작가님 전화는 안받는다고 했을 때,

참 씁쓸했다.


추적 60분 제작진이라고 하면 전화를 받고도 끊어버리고,

섭외는 커녕 수신차단 당하기 십상인

탐사보도프로그램, 추적 60분은

그 모두의 대명사였다.


역사는 역사다. 1326회 36년간의 추적 60분은  

탐사보도프로그램의 역사였습니다.


제작진들 고생하셨습니다.

시청자 1인으로서

역사의 노고와 가치를 가슴에 새기고,


또 다른 역사 '추적60분'으로

언젠가 다시  돌아오길 기원합니다.

추적60분의 종영은 역사의 쉼푭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