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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형식들/이성복 산문집/열화당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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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산문집이다. 주로 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시론으로 볼 수 있겠다. 그는 여러 가지 다양한 비유를 통해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그런 비유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정도의 대가가 나이를 먹은 후에도 늘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열심히 진지하게 공부하는 자세로 사니까 그의 글이 남과는 다른 독특한 깊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의 사유의 경지는 내 수준에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계속 머무르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되새겨야 할 좋은 문장을 오래 가슴에 품기 위해서는 나로서는 그저 기록해두는 수밖에 없다.





한 편의 시는 기존의 시학詩學의 파괴 위에서 태어납니다. 시학은 시의 문입니다. 우리는 문을 지나가지만 등에 업고 가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장애물 경기 주자처럼 끊임없이 형태라는 관문을 넘어서야 합니다. 만약 한 가지 형태에 안주한다면 이미 시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태는 정신의 모습이며 흔적입니다. 비유컨대 우리는 가구 같은 것의 긁힌 자국을 보면 그것을 핥고 지나간 것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힘의 방향과 강도와 지속시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의 형태는 독자로 하여금 그 시가 이루어지게 한 ‘힘’을 즐길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형태는 시인과 독자가 마주 보고 있는 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고, 독자는 자신의 감동을 수확합니다. (67쪽)


나는 어떤 의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건너뛰며 사유한다. 내 시가 난해하다고 그들이 불평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의미에서 의미로 넘어가지 않으면, 그들은 이내 길을 잃고 만다. 나는 분위기에서 분위기로 건너간다. 그러므로 말과 말 사이의 논리적 연관에 대해서는 그리 개의치 않는다. (...) 나의 시는 모험의 과정이며 합성의 묘미이다. (89쪽)


문학은 영혼의 싸움의 결과이다. 이미 발견되고 고정된 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다. 작가는 매 순간 자기 죽음을 죽어야 한다. 진실한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시 죽는 사람이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빌려 자기 죽음을 면제하려 드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문학은 영혼의 갈등에 의해 태어난다. 결과로서의 문학에 집착함으로써, 나는 예술이라는 허깨비만 얻게 되었다. (93쪽)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것은 낙숫물이 뚫었다기보다는 낙숫물의 집요함이, 집요한 희망이 뚫은 구멍이다. 희망은, 비록 그것이 바늘구멍만 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틈새를 만든다. 역사와 문화의 진보는 그런 구멍의 흔적들이다. 예술사藝術史는 그런 작은 흔적들로 뒤덮인 암벽이다. 각 개인의 고뇌의 몸부림이 뚫어 놓은 작은 구멍들. 그 구멍들 앞에서 물러서는 것은 퇴폐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구멍이 뚫리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오늘 아무 성과 없고, 내일 아무 성과 없고, 모레도 글피도, 그리고 죽는 날까지 그러하더라도, 마지막 성과는 나와 무관한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듯이, 허락되지 않은 재능으로 인한 변변찮은 결과는 내 탓이 아니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구멍 앞에서 망설이거나 물러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절망이 죄가 되는 것은 나태와 타락을 부르기 때문이다. (104쪽)


삶에 대한 열정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니나, 삶에 대한 열정에서 태어나지 않는 시는 없다. 문장이 서툴거나 비유가 식상하다는 것은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 쓰는 사람이 도무지 자기 삶과 갈등이 없다는 데 있다. 시는 갈등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과정으로 지속된다. (162쪽)



시라는 칼은 손잡이까지 칼날이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시가 위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라는 칼의 독기와 살기가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당연히 그 칼을 쥐고 있는 손이다. 먼저 스스로 찔리지 않고서는 시라는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를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 스스로를 겨냥한 독기와 살기이다. (166쪽)



어쩌다가 명치끝을 얻어맞으면 순간적으로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를 수 없고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글쓰기도 반드시 읽는 사람의 명치끝을 내지르는 것 같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왜곡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186쪽)



내가 얼마나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가가 모든 문제이다. 진정한 용서란 용서할 것이 따로 없음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할 것이 따로 없음을 아는 것이리라(...) 그리워함이 물리적인 문제라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알고 있는 것도 물리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았는가. 슬픔을 슬퍼하고, 그리하여 슬픔과 한 몸이 될 때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슬픔은, 우리가 슬퍼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208쪽)



더 많은 글들이 가슴을 서늘하게 했지만, 워낙 내용이 많아서 다 옮길 수는 없다. 이런 글이 나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각고의 노력이 동반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따로 내 생각이나 느낌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나는 게으른 독자로서 한 권의 책을 설렁설렁 읽을 때가 많지만, 글을 쓰는 작가들은 자신의 피를 담보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느꼈다. 내가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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