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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Mar 25. 2021

모스크바의 신사/에이모 토울스/현대문학

-외로울 땐 독서





 작품은 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스토프 백작은 프롤레타리아의 시대에서는 퇴출되어야 할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쓴 혁명의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 덕분에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는 거주하고 있던 메트로폴 호텔에서 한걸음도 나갈 수 없는, ‘종신연금형’을 선고받았다.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인 백작은 자신이 지내던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평생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머물던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오래 방치되었던 허름한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게티이미지뱅크





 작품의 전개는 특이하게 펼쳐진다. 백작의 연금이 시작된 6월 21일, 그 하루 뒤, 그 이틀 뒤, 5일 뒤, 10일 뒤, 32 뒤, 6주 뒤, 3개월 뒤, 6개월 뒤, 1년 뒤, 2년 뒤, 4년 뒤, 8년 뒤, 16년 뒤의 하루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1938년을 기점으로 시간의 빠르기가 절반으로 줄어들며 진행된다. 8년, 4년, 2년, 1년, 6개월, 6주, 3주, 10일, 5일, 이틀의 시간을 지나, 다음 날인 1954년 6월 21일을 끝으로 소설이 끝난다. 책을 읽으며 이런 규칙적인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런 시간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작가가 번역자에게 메일로 직접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접하고 나니, 작가가 치밀한 계산을 하고 이 작품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는데, 그가 말한 대로 이 작품에도 그 이상의 품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 작품은 700쪽이 넘는 긴 장편이지만 무척 흥미진진한 전개로 속도감 있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여러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컸다. 특히 주인공인 로스토프 백작의 신사 다움에 매료되었다. 그의 신사 다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멋진 남자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까지 갖춘 것이었다. 



 이 멋진 백작에게 호텔에서 연금 상태로 머물러야 하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그렇지만 로스토프 백작은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깬다. 흔히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상황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로스토프 백작은 거의 완벽하게 그런 지혜를 몸으로 실천한 것 같았다. 

 백작에게 메트로폴 호텔은 살아가야 할 세상 그 자체였다. 넓은 세상에서든, 좁은 세상에서든,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한 때는 고귀한 백작이었던 그가 호텔 웨이터로 전락하게 되었지만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의 품위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의 타고난 특유한 유머와 지성, 그리고 따뜻한 인간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백작은 매주 목요일 12시에 야로슬라프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다듬는다. 어느 날, 이발소에 들렀던 백작이 잠시 기다렸다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이발사가 백작의 머리를 막 다듬기 시작했을 때, 구겨진 재킷 차림의 사내가 백작보다 자기가 먼저 왔다며 항의했다. 이발사가 백작은 미리 예약한 손님이라고 말했지만, 사내는 순식간에 이발사의 가위를 빼앗아 백작의 오른쪽 콧수염을 잘라버렸다. 이발사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백작은 이발사에게 말했다. “깨끗이 밀어줘요, 친구”


 이 사건 하나만으로 큰 혁명을 겪은 1920년대 러시아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백작은 멋들어진 재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신사의 존재는 외투의 맵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도와 발언과 몸가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백작은 생각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거야.
 사실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돈다. 은하수도 돈다. 더 큰 바퀴 속의 작은 바퀴인 셈이다. 천체는 돌면서 시계의 작은 망치가 내는 종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자연의 소리를 낸다. 그 천체의 종소리가 울리면 아마 거울은 불현듯 자신의 보다 더 진정한 목적에 맞게 일할 것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65쪽)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지만, 백작은 현실을 수용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백작은 호텔 종업원, 요리사, 재봉사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가 과거 자신의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과 진심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소탈한 모습에서, 그만의 신사의 품격이 더욱 돋보였다.

 백작은 호텔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꼬마 아가씨 니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호텔 마스터키를 가진 니나를 따라다니며 그가 몰랐던 호텔의 감추어진 온갖 장소를 니나와 함께 몰래 섭렵했다. 니나 덕분에 백작은 잠시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갑갑한 연금 생활을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른다. 


 니나는 부모를 따라 호텔을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되어 나타난 니나는, 체포된 남편을 만나러 간다면서 자기 딸 소피야를 잠시만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니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백작은 졸지에 소피야의 아버지 노릇을 해야 했다. 

 백작은 소피야를 성심껏 키웠고 소피야는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소피야는 프랑스 파리 연주회에 합류해서 가게 되는데, 백작과 미리 계획한 대로, 소피야는 거기서 망명 신청을 했다. 이 과정은 마치 007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긴박하고 스릴이 있었다. 이 작품의 매력적인 반전이었다. 


 결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로스토프 백작을 보면서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생각났다. 프리모 레비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 반드시 살아남아 자신이 체험한 일을 알리고 싶은 의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레비를 그런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게 했던 것이다. 프리모 레비만큼의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백작에서 연금상태의 호텔 웨이터로 전락한 삶이 결코 견디기 쉬운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백작은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지혜롭게 수용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뛰어난 처세술을 발휘했다. 

 그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배한 자였다. 






 이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작품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사회 분위기에서 어렴풋하게 느낀 것은 계급투쟁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였다. 계급투쟁의 이면은 결국은 권력투쟁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수혜자는 결코 인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씁쓸한 진실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이념이 바뀌어도 여전히 약자는 약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너무나 많은 것을 다루어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내가 느낀 몇 가지 점만 적어보았다. 


 참고로, 토울스가 작품에서 그려낸 메트로폴 호텔은, 1907년 개장한 이래 제정 러시아 말기까지 모스크바 귀족들과 부호들이 주로 찾던 곳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볼셰비키 정부가 호텔을 국유화해서 소비에트 최고 지도부의 숙소로 사용했다. 

 그리고 메트로폴 호텔은 러시아가 유럽 여러 나라와 교류하는 외교의 장소이자 체제의 건재함을 대외에 선전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곳, 호화 요리와 고급술, 손님들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이었다. 이런 호텔의 역사를 알고 나니, 소설의 내용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미국 작가가 러시아에 관한 소설을 썼다는 점이 놀라웠다. 한마디로 멋진 소설이다.

 이 작품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추천도서로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빌 게이츠는 이 책을 2019년 여름 도서로 추천하며 이렇게 말했다. 


 “재미있고, 영리하며,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정으로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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