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오랜만에 쫄깃쫄깃한, 정말 씹을수록 맛있는 에세이집을 만났다. 인터넷에서 읽고 그 참신함에 반해버렸던 글들, <추석이란 무엇인가>, <추석을 즐기는 법>, <무신론자의 추석>들의 저자다.
글은 쉽게 읽혔지만 가볍게 흘러가버리지는 않았고,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하게 하는 글들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결코 가볍고 만만한 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글들은 왠지 통쾌하고 유쾌하고 명랑했다. 그의 글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그의 글의 매력은 사실 엄청난 지력智力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학부에선 철학을 전공했고, 미국에서는 동아시아 사상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서 당선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논어》를 번역하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한문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이런 경력을 보면 그가 어떻게 그런 매력적인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몇 개만 골라서 다시 읽어본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23쪽)
-행복에 대한 정의는 가벼울수록 좋은 것 같다. 행복에 지나친 비중을 둘 때 오히려 쉽게 불행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인 듯하다.
아, 실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권태를 이겨내고, 사랑의 상상 속에서 협애한 자아를 넘어 보다 확장된 삶을 경험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들은 대부분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누추하다(...) 일상의 인간들이 사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기꺼이 다른 세계로 사랑할 대상을 찾아 떠난다. (162~163쪽)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다른 세계로 사랑할 대상을 찾아 떠나보았지만, 아직은 절절히 사랑할 그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나의 우울은 그런 사랑의 대상 부재에서 오는 것일까?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은 말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나를 보는 것이 놀랍다. 왜냐하면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다른 때가 아니라 현재여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인간은 자유와 존엄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태어난 당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스스로의 결정이 완전히 배제된, 전적으로 타율적인 사태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벌거벗겨지고, 씻겨지고, 볼이 잡아당겨지고, 신생아실에 무력하게 눕혀진다. 이렇게 시작된 자신의 삶은, 건조하게 말하여, 부모의 성욕이 원인이 된 외인성外因性 사태다.(174쪽)
-살벌한 진실이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 된 도리라든가 당연한 효도를 논하는 현실은 마치 블랙코미디 같다. 부모-자식 관계도 좀 더 쿨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혈연관계가 너무 끈적거려서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때가 많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지나치게 억압적으로 작동할 때가 많은 듯하다. 주변에서 그런 현실의 폐해를 많이 보았다. 그것은 고통을 넘어선 슬픔이었다.
소반과 숟가락 중에서
전시기획자들은 원래는 낮은 방바닥에 놓여 있었을 그 낡은 소반들을 들어 올려, 화이트 큐브 안의 높은 단상 위에 안치했다. 그렇게 들어 올려진 소반들은 마치 처음으로 화려한 축제에 초대된 내성적인 사람들처럼 상기된 모습으로 높은 곳에 말없이 앉아 있다. 흰 방의 밝은 조명 아래 검붉은 칠은 도드라지고 마디를 이은 금속 장식들은 빛을 받아 단아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일관되면서도 곡선을 이루는 배치 간격을 유지한 덕분에 따로 떨어져 있었을 때는 부여받지 못했던 음악적 리듬감이 각각의 소반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다. 어떠한 밥그릇도 이고 있지 않은 채 흰빛만을 받고 있는 그 낡은 소반들은, 이제 자신들이 속해 있던 고된 노역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고양된 의미를 가진 오브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소반이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전시기획자들의 안목을 통해 창조된 아름다움이다. 어떤 대상도 그것이 적절히 전시되지 않으면 아름다움을 입을 수 없고 어떻게 전시되느냐에 따라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발생한다. 관람자가 체험한 것은 소반의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소반 전시의 아름다움이다.(200~201쪽)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이 소반에서 옛 어머니의 모습을 느꼈다. 평생 밥그릇을 위한 고된 노역의 세계에서 존재감 없이 살다 간 우리들의 어머니가 자꾸 떠올랐다.
아름다움은 창조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지만 창조될만한 재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 대상이나 잘 전시된다고 아름다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시기획자들이 숨겨진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원래 있던 아름다움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아름다움의 재해석이라고나 할까.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에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292쪽)
-예술이 일상에서 실현된다면 말 그대로 예술의 최고 목표가 달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할 수 있을까? 삶 자체가 예술이라면 우리들의 일상이 누추하고 진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은 각 개인이 고민해할 문제다.
어떤 종류의 헌신, 어떤 종류의 욕망 없이는, 우리의 삶은 구겨진 종이에 불과하다.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무엇엔가 헌신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한숨은 이 헌신과 배반의 스토리로 번안할 수 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좀처럼 우리를 배반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헌신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299쪽)
-욕망과 헌신, 그리고 배반의 스토리! 이것은 뻔한 우리 삶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다.
어제는 장례식에 다녀왔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등에 이고 있다. 생명만큼이나 죽음도 자연스러운 사건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죽음을 절대 오면 안 되는 그 어떤 것처럼 맞이할 때가 많다.
저자는 프롤로그 <아침에 죽음을 생각한 이들의 연대기>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정념으로부터 다소나마 풀려날 것이다. 평생 원했으나 가질 수 없었던 명예에 대한 아쉬움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영원히 살 것처럼 굴기를 멈출 것이다. 소소한 근심에 인생을 소진하는 것은, 행성이 충돌하는데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5~6쪽)
-어떤 면에서는 죽음은 삶을 가볍게 해주기도 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살아있음’ 외에는 별로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며, 삶의 시작이다. 삶을 시작할 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을 좀 더 가볍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프롤로그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가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단풍잎이 떨어져 물에 흐르지 않았다면
타츠타 강물의 가을을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사카노 우에노 고레 노리(일본 헤이안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