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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의 아틀리에/장 주네/열화당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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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주네의 자코메티의 작품에 대한 예술론이다. 피카소는 장 주네의 이 예술론을 “내가 읽은 가장 훌륭한 예술론”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는 연극으로도 상연되어 호평을 얻었다. 소설도 아닌 예술론이 무대에 올려졌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만큼 장 주네의 예술론이 생동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연극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장 주네는 ‘도둑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어릴 적부터 소년원과 감방을 전전하다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사르트르, 보부아르, 콕토 등의 도움으로 출감해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장 주네는 자코메티와 우정을 쌓으면서 그의 아틀리에를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코메티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코메티의 작품에 대해서 느꼈던 점에 대해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이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다.






나는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장 주네의 예술론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의 예술론은 어려운 이론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꼈던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장 주네의 글을 읽다 보면 아주 미미한 것이긴 하지만, 예술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했다.



그의 조각상들은 아주 친근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듯한 묘한 느낌도 불러일으킨다. 조각상들은 시간의 밑바닥, 모든 것의 기원에 자리하여 어떤 동요에도 꿈쩍하지 않는 절대 부동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다가서고 물러서기를 그치지 않는다. 조각상들을 눈으로 익혀 가까이하려 할수록 상들은 까마득히 멀어지면서 갑자기 상과 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펼쳐진다. 이는 격정이나 노여움 때문이 아니고 그렇다고 내게 대단한 위력이 생겨서도 아닌, 단지 조각상과 나 사이의 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생략되고 압축된 듯한 착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디로 간 걸까.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어디에 있는 것일까.(8쪽)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가장 멀리 떨어진 극한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친숙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그 왕복에 의해 지탱되는 것 같다. 이 오고 감은 끝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조각들에 움직이는 느낌을 주고 있다.(27쪽)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은 소멸해 버린 세대에 속한 느낌, 숱한 시간과 밤이 지혜롭게 갈고닦아 부식시킨 후 부드럽고도 견고한 영원성의 기운을 담아 우리 앞에 내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마에서 아주 뜨거운 열로 구워낸 후에도 잔여물이 남듯이, 그의 조각상들은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꽃은 또한 얼마나 대단했던가!(30쪽)


조각상들을 바라보면서 장 주네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묘사한 부분이다. 대상의 심장에까지 깊숙이 들어가 본 사람만이 느낄 만한 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전문적인 이론에 기대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잘 표현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대상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대상은 어떤 식으로든 감상자에게 다가와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하는. 물론 내 멋대로의 해석이지만, 장 주네의 글에서 예술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그의 감상 태도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떤 대상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대상 이외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 대상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그의 말은 알 듯 말 듯했지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장롱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결국 장롱이 아닌 모든 것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러한 노력은 나를 묘한 존재로 만들어 버려, 나라는 존재 즉 관찰자로서의 나는 더 이상 현재의 인물, 현재 시제의 관찰자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로, 그리고 불확정한 미래로 뒷걸음질 치게 된다. 장롱이 머물러 있기 위해서 관찰자인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게 되고, 장롱과 나 사이의 모든 감정적 관계, 도구적 유용성의 관계는 소멸해 버린다. (35쪽)


장 주네는 자코메티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고독’으로 본 듯했다. 사실 고독은 거의 모든 예술가들의 단골 화두인 듯하다. 그렇지만 장 주네가 말하는 고독은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모든 존재와 사물이 인식하고 있는 고독을 죽은 자들에게 전달해 준다. 그리고 그 고독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우리의 영광이다. (16쪽)


내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존엄성, 뿌리 깊이 단절되어 있어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한다.(26쪽)


짧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자코메티라는 작가에 대한 장 주네의 생각을 깊이 있게 접할 수 있었다. 책 한 권으로 장 주네와 자코메티를 동시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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