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그의 조각상들은 아주 친근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듯한 묘한 느낌도 불러일으킨다. 조각상들은 시간의 밑바닥, 모든 것의 기원에 자리하여 어떤 동요에도 꿈쩍하지 않는 절대 부동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다가서고 물러서기를 그치지 않는다. 조각상들을 눈으로 익혀 가까이하려 할수록 상들은 까마득히 멀어지면서 갑자기 상과 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펼쳐진다. 이는 격정이나 노여움 때문이 아니고 그렇다고 내게 대단한 위력이 생겨서도 아닌, 단지 조각상과 나 사이의 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생략되고 압축된 듯한 착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디로 간 걸까.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어디에 있는 것일까.(8쪽)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가장 멀리 떨어진 극한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친숙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그 왕복에 의해 지탱되는 것 같다. 이 오고 감은 끝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조각들에 움직이는 느낌을 주고 있다.(27쪽)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은 소멸해 버린 세대에 속한 느낌, 숱한 시간과 밤이 지혜롭게 갈고닦아 부식시킨 후 부드럽고도 견고한 영원성의 기운을 담아 우리 앞에 내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마에서 아주 뜨거운 열로 구워낸 후에도 잔여물이 남듯이, 그의 조각상들은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꽃은 또한 얼마나 대단했던가!(30쪽)
장롱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결국 장롱이 아닌 모든 것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러한 노력은 나를 묘한 존재로 만들어 버려, 나라는 존재 즉 관찰자로서의 나는 더 이상 현재의 인물, 현재 시제의 관찰자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로, 그리고 불확정한 미래로 뒷걸음질 치게 된다. 장롱이 머물러 있기 위해서 관찰자인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게 되고, 장롱과 나 사이의 모든 감정적 관계, 도구적 유용성의 관계는 소멸해 버린다. (35쪽)
자코메티의 작품은 모든 존재와 사물이 인식하고 있는 고독을 죽은 자들에게 전달해 준다. 그리고 그 고독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우리의 영광이다. (16쪽)
내가 말하는 고독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존엄성, 뿌리 깊이 단절되어 있어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도 없는 개별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렴풋한 인식을 의미한다.(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