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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매뉴얼/백상현/위고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죽음에의 지식, 무지에 관한 지식, 무의미의 의미 또는 사라짐의 욕망에 관한 욕망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고 했다.


‘어떻게 완벽히 사라질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했다. 부제가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이다. 철학에 관해 문외한인 내가 접근할만한 책인지는 회의적이었지만, 바로 라깡과 바디우에 다가갈 기본이 없으니, 우선 중간 매개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죽음을 욕망하는 것은 삶을 욕망하기 위한 전제이므로, 이 책에서 삶의 전개가 아닌 중단의 순간들을, 희망이 아닌 절망한 자들의 세계관을, 소통이 아닌 고립과 고독의 매뉴얼을 소개한다고 했다.


저자는 라깡의 거울 단계 이론을 통해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신체적 통일성의 개념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 같은 거울 단계의 은유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울 보는 아이가 의존하는 타자의 개념인데, 우리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고정관념이라는 타자의 시선의 의존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타자에 의해서 기록된 책과 같다고. 이것은 인생이 끝없이 서로를 재현하는 책에 관한 책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라는 사람의 인생의 책은 나의 부모들의 인생의 ‘책에 관한 책’이었고, 한 시대라는 ‘책에 관한 책’이었다. 이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도서관의 무한한 목록들과 같다. 책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재현의 반복에 불과했으며, 이와 같은 거울 관계는 인간의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논리이다. 그리하여 삶은 아주 정교한 반복의 통제 속에서 양적인 확장만을 거듭하는 가무한적 집합과 같은 것이 된다. (105쪽)


이처럼 세계는 거울과 거울로 이어지는 가무한적인 거울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라깡은 세계를 거대한 환상의 극장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정신분석의 실천 목표를 ‘환상의 횡단’으로 설정한다.

환상의 횡단은 타자나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되는 환상을 거부하거나 벗어나려는 몸짓이다. 즉 유령-되기의 실천인 셈이다. 이런 유령은 자아를 원치 않은 고독의 자리로 이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고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고독의 절차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자신의 주어진 조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사랑의 절차. 그것은 어떻게 나르시시스적 자아의 한계가 역설적으로 돌파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절차이다. 고독의 절차는 나의 자아라는 괴물을 숨 쉬게 하는 외부로부터의 공기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존재를 진공의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며, 이때 질식당한 자아는 텅 빈자리를 남기며 소멸한다. 고독의 절차는 바로 그 텅 빈자리를 유지하는 욕망의 기술이다. 텅 빈자리에 어느덧 사건의 유령이 들어와 떠돌 수 있도록 소량의 환상만을 허용하는 기술. 그것은 소멸을 애도하는 기술인 동시에, 그러한 애도를 축제로 뒤집는 기술이다. 매번 새로 시작되어야 하는 세계를 위한 고독하지만 어쨌든 축제인 그것.(124)


저자는 라깡과 바디우의 이론을 통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역설했지만, 철학 용어의 생소함으로 인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고정관념과 지식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런 고정관념과 지식은 세계를 구성하고, 세계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결코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 매몰되면 자기만의 세계를 창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어려운 라깡이나 바디우의 이론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책의 취지는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치열한 철학적 분석과 과정을 전개해나가는 것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말 그대로 ‘철학의 모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가끔은 이런 책을 읽어주는 것도 필요한 일 같다. 뇌에 스트레스를 줄 때 뇌 세포가 더 많이 활성화될 것이므로.


고정관념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유령-되기의 매혹에 대해 저자가 한 말을 옮기며 이 글을 맺으려고 한다. 여기에 이 책의 핵심이 거의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세계의 풍경이 뽐내는 이미지의 화려함들을 단숨에 횡단하도록 만드는 텅 빈 것의 매혹. 그것은 유령의 매혹이다. 세상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한 유령의 불법체류가 자신을 배제한 세상을 오히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뒤바꿔버리는 마술적 환멸의 매혹. 세계의 막강한 지식 체계에 대항하는 텅 빈 것에 관한 지식이, 공백의 (비)지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울 수 없는 자는 채울 수도 없다는, 창조에 관한 절대적 명제(...)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너무도 평범한 삶의 너무도 비범한 진리이다(...) 결국, 스스로의 존재에 관련된 사유의 몰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유를 시작조차 할 수 없다.(166~167)



*참고

책을 읽고 나서도 뭔가 계속 미진한 느낌이 들어서, 저자 백상현의 유튜브 강의를 들어보았다.

라깡은 읽히지 않는 텍스트를 쓰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비유하자면 예수의 말들이 이해하라고 있는 말이 아닌, 성사聖事인 것처럼. 성사聖事는 성스러운 사건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라깡은 자신의 기표가 지식 쌓기가 아닌, 성사처럼 사용되길 원했다.


라깡은 그의 글이 어려운 이유는, 그의 글이 무의식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며 무의식은 이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의식의 기표가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의식의 기표와 다르기 때문이고, 그 무의식이 이해되었다는 것은 의식이 항복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분석이 진행되면 안 되는 것은 무의식에 대한 모독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이해되지 않는 기표를 체험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프로이트는 서구 문명에 사형선고를 한 자이며 파괴하는 자였다. 이해될 수 없는 기표는 의미의 세계를 파괴하고 공백을 남겼다. 프로이트 이후의 라깡은 공백을 선물로 받았고, 그는 그 공백의 해석학자인 셈이다.

라깡의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개인이 ‘자신의 무의식적인 시인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의미의 세계를 파괴하면 텍스트는 지워지고 공백만 남게 되고, 우리는 그 공백의 새로운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책보다는 강의가 더 잘 이해가 되었다. 라깡의 의도에는 벗어나는 일이 되겠지만.

라깡은, 어떤 텍스트가 읽힌다는 것은, 현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 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타자의 언어 권력에 귀속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라깡의 말을 내 식대로 이해한다면,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타자의 언어 권력에 귀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아직도 아리송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읽기의 어려움을 제대로 체험하게 했는데도, 묘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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