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저자 김원영은 골형성 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으며, 열다섯 살까지 병원과 집에서만 생활했다.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의 중학부와 일반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일했으며,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에서 연극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중이다.
저자에 대한 소개는 책날개에 이렇게 간략하게 나와 있다. 이 몇 줄의 소개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을 다 읽어낼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그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예전에 비해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 시설들이 많이 나아지긴 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배려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묻는 것 같았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실격당한 자들인가? 하고.
그는 이 책의 ‘들어가며’에서, ‘잘못된 삶 wrongful life’ 소송을 언급했다. 이 소송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으로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의 한 유형을 말한다. 의사의 실수로 아이에게(부모에게) 손해가 발생했으니 그것을 배상하라고 청구하는 것이다. 깊은 생각 없이 그런 소송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부모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을 읽고 나의 생각 없음을 바로 깨달았다. 한 사람의 삶을 득실로 계산할 수 없다는 것. 누구나 삶은 존엄한 것이라는 것. 그래서 모두의 삶은 평등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라고 한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다. 그러므로 부모일지라도 자기 자식의 삶을 ‘손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삶을 ‘잘못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장애나 질병이 심하고, 다수가 혐오하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삶’이 되기 쉽다.(14쪽)
이어서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결국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진 생생한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전개할 무대와 관객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무대가 설계되어 진지한 관심을 가진 관객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훨씬 깊은 존중을 받으며 매력적인 관계로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임을 보이고자 한다.(15쪽)
장애가 있건 없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그리고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 positive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무엇이 ‘아닌 것’이라는 소극적 형태로는 그와 같은 스타일 만들기가 불가능하다. 내가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휠체어의 디자인을 고민하고 그것을 우리 몸에 맞게 조율하며 허세를 부릴 때, 우리는 분명 ‘정상성의 결여’로서 ‘나’를 인식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하기 전까지 나는 오직 ‘정상’이 아닌 상태로 존재했다. 나의 외모와 정신의 스타일을 추구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했다. (124~125쪽)
무엇이 정상성일까? 장애가 없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면 그것은 비정상인가? 여기서 우리는 수평적 정체성 horizontal identity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정체성에 어떤 우열이 있는가? 그런 우열은 누가 정한 것인가? 모든 인간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하듯이, 모든 인간의 정체성도 똑같이 평등해야 한다. 그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이므로 수평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때에만 정상성의 결여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인 자신을 인식하는 정신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다. (128쪽)
정체성에 대한 그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자.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149쪽)
인간은 자신과 다르면 배척하거나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정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비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차별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많은 것 같다. 물론 나 자신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장애를 가진 자식의 마음을 그의 부모조차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삶의 스타일, 즉 고유성이 있고, 그의 삶은 평등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가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우리가 가진 고유성, 자기 삶을 직접 작성하는 저자 성 authorship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작성’이란 자기 삶의 경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해명(설명)하면서, 자기 선택을 반성적 reflective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186쪽)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살아갈 때 행복해진다. 그런 유대감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할 때 생기는 것이다. 진실을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것. 이 단순함의 원리를 기억한다면 우리들의 삶은 좀 더 따뜻하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는 저자의 말이 오랫동안 귓전에 울리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