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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김화영 옮김/민음사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이 작품은 2부로 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장례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는 알고 지내던 친구 레몽의 일에 우연히 얽혀 아랍인을 살해한다.


2부에서는 뫼르소가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9쪽)


충격적이었다.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마치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눈앞의 현실인데도, 주인공인 뫼르소는 마치 몽롱한 비현실의 세계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내 느낌은, 무의식적으로 사회화된 시선 때문이었을 수 있다.


뫼르소는 마렝고의 양로원에 가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는 여자 친구인 마리와 바다로 가서 놀기도 했고 희극영화를 함께 보기도 했다. 그는 알고 지내던 레몽의 부탁으로 그의 전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써주었고, 경찰서로 가서 레몽이 전 여자 친구를 구타한 이유의 증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뫼르소는 이성적으로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순간순간의 느낌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행동은 사회제도의 도덕률 따위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레몽은 알제 근처의 바닷가에 조그만 별장이 있는 그의 친구 마송이 일요일에 뫼르소를 초대한다고 했다. 뫼르소는 마리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근처에서 레몽의 전 여자 친구 오빠가 끼어 있는 아랍인들과 부딪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레몽이 좀 다치긴 했지만 싸움은 끝이 났다.


뫼르소는 혼자 바닷가를 걷다가 커다란 바위 뒤에 있는 샘가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다시 아랍인을 만났다. 그때 아랍인이 들고 있던 칼이 햇볕에 반사되어 뫼르소의 눈을 찔렀다. 그는 어머니 장례식 때의 강렬한 태양빛이 떠올랐고,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며,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그 아랍인을 쏘아서 죽였다.


눈부신 햇빛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살인을 하게 된 그는 재판을 받게 되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도 않았고, 자기를 변호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점에 대해서 카뮈는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뫼로소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로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그에게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 선고를 받는다.


뫼르소를 재판하는 재판관들은 그의 살해 동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살해 이전의 그의 행동을 근거로 그를 단죄하려고 한다. 아랍인을 살해하기 전에, 뫼르소는 그의 어머니 장례를 치르렀다. 재판관들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뫼르소가 울지도 않았고, 애도 기간을 제대로 보내지 않고서 여자 친구와 즐겁게 놀러 다녔다는 사실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뫼르소를 애초에 충분히 살인을 할 가능성이 많은 ‘악인’으로 판정하기에 충분한 ‘증거들’로 보았다.


이 작품을 2부에 등장하는 재판관들처럼 도덕성을 기반으로 분석할 수는 없을 듯하다. 소설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리적인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뮈가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에서 한 말을 참고로 하면 그의 작품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은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이며 사생활의 변두리에서 주변적인 인물로서 외롭게, 관능적으로 살아간다.


작가는 이 사회의 관습이 인간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하는 듯하다. 남들이 보는 장례식 때는 눈물을 흘러야 하는데, 그런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정상이 아닌, 위험인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뫼르소도 당연히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는 드러내 놓고 슬픔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나중에 그가 살인을 한 후에 아주 극악한 인간으로 평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회의 관습을 따르기 위해서 일종의 가면을 쓴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편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그만큼 사회에서 적응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뫼르소는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를 판단하자면, 사이코패스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소설은 문학이고, 문학은 도덕성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 즉 제도권 안의 ‘문제적 인간’을 다루며, 그 인간이 처한 사회제도 안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려고 한다.


카뮈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처음 시작 때부터 내 작품 세계의 정확한 계획을 세워 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선 부정(否定)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 가지 형식으로, 그것이 소설로는 『이방인』, 극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 사상적으로는 『시지프 신화』였다.”


카뮈가 밝힌 대로, 『이방인』은 관습이나 사회 제도의 부조리함이 인간을 어떻게 억압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듯했다.

‘페르소나’ 없는 인간은 정직하지만, 사회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그러나 뫼르소는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정직함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뫼르소는 자유를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죽음을 누구에게나 일어날 하나의 ‘사실’로 생각했다. 그에게 정직함은 인간의 자유였고, 그는 자유가 죽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당연히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여러 천 년 동안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요컨대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지금이건 이십 년 후건 언제나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었다.(126쪽)



이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의 작품 해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알베르 카뮈의 세계는 삶의 기쁨과 죽음의 전망, 빛과 가난, 왕국과 유적, 긍정과 부정 등 ’ 안과 겉‘의 양면이 언제나 맞물리어 공존하는 세계다. 그는 그 어느 쪽도 은폐하거나 제외하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삶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어둡고 비극적인 또 다른 면을 뚜렷하게 의식했다. 삶의 종점인 희망 없는 죽음은 그로 하여금 세상만사의 무의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방인』은 바로 이 허무감의 표현인 동시에 이 허무감 앞에서의 반항을 말해준다.


『이방인』의 구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김화영이 언급한 것처럼, 그의 작품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그것을 한 번에 다 분석하기는 힘든 일이어서, 이번에는 뫼르소의 페르소나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았다.

사실 뫼르소에게는 페르소나가 없었다. 제도화된 사회 안에서 페르소나가 없는 인간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카뮈는 페르소나 없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가 인간을 위선적으로 몰고 가게 하는 부조리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방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즉, 관습이나 기존 제도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했다. 그것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지만, 작가의 멋진 성취로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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