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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장석주/다산책방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오랜만에 장석주의 책을 만났다.

‘은유의 힘’, 즉 시에 관한 이야기다.

시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시와 은유와의 관계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시는 ‘은유’ 그 자체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이 책에서 장석주는 은유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었고, 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국내외의 시인들의 시들을 예로 들어, 그런 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상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얘기해주었다.


책을 읽으며 문득 든 생각은, 시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은유와 시에 관한 좋은 내용들이 책 전체에 차고 넘치는 듯했다. 그 좋은 글들을 잊고 싶지 않아 몇 개를 옮겨본다.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그것은 차라리 텅 빈 신체다. 이것은 항상 없는 것,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을 새 현전으로 뒤집어쓰고 새로 태어남이다. 살로 채워진 것으로서의 신체와 텅 빈 신체의 관계가 그렇듯, 대상과 은유 사이에는 엄연하게 벌어진 틈이 있다. 대상과 은유 사이가 벌어질수록 은유의 효과는 커진다. 틈이 생긴다는 것은 항상 불일치, 혹은 낯설게 함을 전제로 삼는다. 은유를 만드는 자들은 은유를 전유하면서 이 틈의 이격(離隔) 효과를 손아귀에 넣는다. 이 틈이야말로 의미가 말없이 깃드는 장소이니까.(31~32쪽)


시인들은 고뇌와 기쁨들을 보는 천 개의 눈을 가졌다. 천 개의 눈으로 천 개의 세계를 본다. 꽃, 향기, 새들에 매혹돼 이것들과 덧없는 연애에 빠지는 자들이 시인이다. 이것들의 빛과 어둠, 영원과 찰나를 노래하는 일들의 하염없음이라니!(41쪽)


시인은 자기 세계의 한 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 어디에 살든지 농경시대의 농부들은 대지의 자식들, 기후의 예측자들, 씨앗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은 자연 세계의 중심에서 제 삶을 꾸리는 탓에 ‘풍격’의 중심을 꿰뚫어 본다.(85쪽)


시인은 한 사람의 생애를 살되 한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 한 시인은 여러 사람으로, 여러 겹의 생을 살아낸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안의 자기와 대면한다. 보통은 자기 안의 자기는 한 사람이지만 시인의 경우 그 ‘자기’가 여럿이다. 삶이라는 수수께끼 앞에서 시인들은 여러 사람으로 그것에 대처한다. (87쪽)


‘초록’이라는 말은 ‘초록’으로 완전하다. 허나 ‘초록’을 표현하려는 자에게 ‘초록’이란 말은 부족하다. 그것은 ‘초록’이라는 경험의 전부를 드러낼 수 없다. ‘초록’이라는 말은 ‘초록’의 경험에 가 닿지 못하고 중간에서 추락한다. ‘초록’이란 말은 ‘초록’의 추상만을 겨우 건드린다. (100~101쪽)


시 쓰기는 말을 도구로 쓰는 일이 아니라 말을 갖고 노는 일이다. 말은 유희성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하다. 말을 부리면 말은 온전한 의미에서 어긋나간다. 시인은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을 일방으로 연모하는 자다. 좋은 시는 항상 말의 부재 속에서 나타난다.(102쪽)


시는 엄청난 영감이나 고매한 착상이 아니라 날마다 “떠오른 생각, 일어난 일, 무언가 주의를 끄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데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찰나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시는 그토록 작은 진실만을 머금기 때문이다. (173쪽)


좋은 시는 지옥에서 올라온 물건, 놀랍고 의외의 것, 예기치 않은 사건이다. 시는 직관으로 직관을, 무의식으로 무의식을 드러낸다. 이 창의성의 총체, 의외의 발상,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 시가 종이에 쓰이고 종이에 인쇄되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189~190쪽)



시는 번개들을 낚아채는 피뢰침이다. 우리는 마른하늘에 떠다니는 번개들을 보지만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오직 직관의 시들만이 번개들을 낚아채는 기적을 만든다. 시는 논증이나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전에도 없는 말이요,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상징이다(...) 시인들은 제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이것들을 세계에 중계한다. 어느 시대에나 가장 신비한 시인들은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샤먼이고, 저도 모르는 방언을 하는 예언자다. (256~257쪽)



좋은 시들은 시가 말의 무덤이거나 수사(修辭)이기 이전에 리듬이고 속도라는 걸 일러준다. 시를 쓴다는 건 사물과 세계에 제 리듬과 속도를 찾아 되돌려주는 일이다(... ) 시에서 불거지는 앎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규범과는 무관할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이런 앎에 이르는 정합성을 어루만지고 그에 대해 판단한다. 이런 시구를 읽을 때 앎 이전에 몸이 먼저 시의 리듬에 반응한다. 리듬이란 정신의 율동이고, 세상을 가로질러가는 마음의 속도다. 모든 사물들은 저마다 리듬이 있고, 세계는 속도의 밀도로 만들어진 물질이다. 시는 바로 그 리듬과 속도에 반향 하는 리듬과 속도다. 시인들은 시를 쓸 때 리듬을 탄다. 리듬의 즐거움이 없는 시는 죽은 시다. (271~272쪽)



인용한 글들을 읽어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껴진다. 사람이면 누구나 매 순간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있다. 이런 스쳐가는 순간의 느낌들을 흘려버리지 않고 기록해둔다면, 그건 그 사람이 쓴 ‘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시에 어떤 모범 답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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