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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파스칼 키냐르/문학과 지성사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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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치명적으로 아름답고 강렬한 작품.

키냐르는 이 작품에서 17세기 유명한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인 마랭 마래와 그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지는 생트 콜롱브를 소환해서 그만의 아름답고 예술적인 상상력으로 다시 창조했다. 작품 속 생트 콜롱브의 두 딸은 키냐르가 창조한 인물들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프랑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 그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1991년 알랭 코르노 감독이 영화로 제작했다. 키냐르가 직접 시나리오를 각색했고, 그의 친구이자 현대 비올라 다 감바 계의 명장인 조르디 사발이 음악을 맡았다.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아주 흥미로울 듯하다.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은 두 살과 여섯 살 난 두 딸아이를 남기고 죽었다. 생트 콜롱브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큰 회한으로 남았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음악에만 몰두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비올라 다 감바를 연구했고, 꽤 유명한 선생이 되었다. 그의 제자 콤 르 블랑은 그가 인간 목소리의 모든 굴곡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젊은 여인의 탄식에서부터 중년 남성의 오열까지, 앙리 드 나바르의 전장에서의 외침부터 그림 그리는데 열중하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숨소리까지.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거친 헐떡임부터, 기도에 몰입한 한 남자의 장식음 거의 없는, 무음에 가까운 저음까지.(11쪽)


생트 콜롱브는 딸들이 크자 비올라 다 감바의 조율, 화음, 분산 화음, 꾸밈음 등을 가르쳤다. 생트 콜롱브 가족의 비올라 다 감바 삼중주는 금세 유명해졌다.


루이 14세는 생트 콜롱브에 대한 칭찬을 듣고 그들의 연주가 듣고 싶어서 자기가 총애하는 비올라 다감바 연주자 케녜씨를 생트 콜롱브의 집으로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말을 하며 거절했다.


“여보시오, 나는 내 인생을 뽕나무 회색 나무판자에 맡겼소, 비올라 다 감바 7현의 소리와 내 두 딸아이에게 맡겼소. 추억이 내 친구들이오, 버드나무가 있고, 강물이 흐르고, 잉어와 모샘치가 뛰어놀고, 딱총나무 꽃들이 피어 있는 곳이 내 궁이오. 궁에 가서 폐하께 아뢰시오. 35년 전 아버지 선왕 때는 있었던 야생의 것이 지금 폐하의 궁에는 전혀 없다고 말이오.”(25쪽)


이 말은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디오게네스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디오게네스가 "위대한 왕이시여, 지금 당신은 나의 따뜻한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옆으로 한 발짝만 비켜서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생트 콜롱브는 어떤 지위나 명예도 원하지 않았고, 오로지 음악의 즐거움에 빠져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원한 삶은 동양의 도가道家적인 삶인 듯했다.


어느 날 마렝 마레라는 한 청년이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다. 그는 어릴 때 왕 관할 성당 성가대원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목소리가 망가지자 쫓겨났다. 그는 구둣방을 하는 아버지 가업을 잇기 싫어서 비올라 감바 연주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생트 콜롱브는 그의 연주를 듣고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자넨 음악은 하네만, 음악가는 아닐세.”라고 했다. 그러자 딸 투아네트가 아버지에게 마레의 작곡 곡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 곡을 들은 후 생트 콜롱브는 마레에게 한 달 후에 다시 와보라고 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생트 콜롱브는 마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몸의 자세를 알고 있네. 연주에 감정도 부족하지 않고, 가볍게 활을 놀리고 잘도 퉁기지. 왼손은 다람쥐처럼 날쌔고, 생쥐처럼 잘도 내빼지. 꾸밈음은 기가 막히고 때론 매력적이지. 하지만 난 음악은 듣지 못했네.”(52쪽)


“느끼는 심장은 있는가? 생각하는 뇌가 있는가? 춤을 추게 하기 위한 것도, 왕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닐 때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 아는가?
그런데 자네의 망가진 목소리가 나를 감동시켰네. 자네 고통 때문에 받아들였지, 자네 기교 때문이 아닐세.”(53쪽)


이 말에서 예술에 대한 생트 콜롱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예술은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어떤 울림이나 열정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어느 날, 생트 콜롱브 씨와 마레가 화가 보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 도정에서 생트 콜롱브가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듯한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람이 휙휙 소리를 냈다. 그들 발바닥 밑에서 얼어붙은 땅이 빠지직 소리를 냈다. 생트 콜롱브는 제자의 팔을 잡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들은 두 눈을 강타하는 바람을 헤치며 앞으로 난 길을 향해 상체를 구부리고 시끄럽게 걸어갔다.
“들리나!” 스승이 외쳤다. “아리아가 저음에서 어떻게 나오는지?”(57쪽)


생트 콜롱브 씨가 불쑥 제자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그들 앞에 한 소년이 바지춤을 내리고 눈 속에 구멍을 내며 오줌을 누고 있었다. 눈 속에 구멍을 뚫는 뜨거운 오줌 소리와 눈 입자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생트 콜롱브 씨는 다시 한번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꾸밈음 스타카토가 저걸세.”
“반음계 하강음이기도 하죠.” 마렝 마레가 응수했다.(63쪽)



음악은 이미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자연의 소리가 음악이었다. 자연의 소리를 저렇게 음악으로 들을 수 있으려면 특별히 예민한 ‘심장과 귀’가 있어야 할 듯싶었다. 그런 예민함은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트 콜롱브와 제자의 대화에서, 음악은 자연의 모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생트 콜롱브는 마레를 집 밖으로 쫓아냈다. 마레가 몰래 궁정 예배당에서 왕 앞에서 연주를 했기 때문이었다. 생트 콜롱브 씨는 마레의 악기를 벽난로 선반 위에 내려치고 돈주머니를 던졌다.


1676년 마레는 왕실 음악가로 입궁하게 되었다. 생트 콜롱브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겠다고 했다. 마레는 스승에게 작품을 왜 출판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작곡을 하지 않네. 난 절대 악보를 쓰지 않아. 내가 가끔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 있는 작은 송충이 같은 현물일세.”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75쪽)


그의 말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작곡이라는 이름으로 악보를 쓰지 않고,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 내기, 자신의 살아 있는 심장을 찢는 듯한 연주. 이런 지어냄과 연주 속에는 예술가의 혼이 날것 그대로 숨 쉬고 있었다. 도가道家적 물아일체의 경지가 느껴졌던 장면이었다.


마레는 스승에게 쫓겨났지만 도저히 스승의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스승의 음악의 아름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승은 작곡한 곡을 출판하지도 않았고, 제자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마레는 이 작품들이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너무 늦기 전에 그 곡들을 알고 싶었다.


마레는 베르사유를 떠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새도록 달려 비에브르로 향했다. 3년 동안 마레는 매일 밤 오두막 바깥에 몰래 숨어서 스승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689년, 23일째 되던 날 밤, 마레는 얼어붙은 나무판자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다. 생트 콜롱브는 「샤콘 뒤부아」를 연주하고는 한탄했다.


“아, 나는 너무 늙어버린 그림자들하고만 말을 하고 있군. 갈 사람은 가야 하는데. 아, 만일 나 말고 음악을 아는 누군가가, 살아 있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다면! 우리가 화답을 할 텐데. 그에게 맡기면 나는 죽을 수 있을 텐데.”


그때 마레는 추위에 떨며 한숨을 쉬다가 그만 오두막 문을 건드렸다. 스승이 누구냐고 물었다.

“궁을 도망쳐서 음악을 찾는 이요.”

“음악에서 무엇을 찾으시오?”

“회한과 눈물을 찾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생트 콜롱브는 말했다.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마레는 음악이 위한 것들이, ‘신, 귀, 황금, 영과, 침묵, 경쟁하는 음악가, 사랑, 사랑에 대한 회한, 단념, 보이지 않는 자에게 바치는 고프레’ 냐고 물었다.

스승은 모두 아니라고 하면서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라고 말했다.

제자는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라고 대답했다.

스승의 늙고 뻣뻣한 얼굴 위에 미소가 번졌다.


음악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것.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을 태우는 것. 이 모든 말은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 해당되는 말인 듯싶다. 이 말은 작품에서 키냐르가 말하고 싶은, 예술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두 사람은 포도주 병과 비올라 다 감바와 포도주 잔들과 접시를 준비했다. 생트 콜롱브 씨는 붉은 모로코가죽 장정의 음악 노트를 펼쳤고, 마레는 그의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들은 노트를 바라보고, 다시 덮고, 앉아서, 조율했다. 생트 콜롱브 씨는 허공에서 손을 저으며 박자를 세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현을 짚었다. 두 사람은 「눈물들」을 연주했다. 두 비올라 다 감바의 선율이 올라가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천창을 뚫고 들어온 빛이 오두막 안에 퍼졌고 그 빛은 어느새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눈물이 코에, 뺨에, 입술에 천천히 흘러내릴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마레 씨가 베르사유로 돌아간 것은 새벽녘이 되어서였다.(122쪽)


감동적인 결말이어서, 좀 길지만 그대로 다 인용했다.

스승의 음악에 대한 제자의 열렬한 존경과 사랑.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합주. 자신을 태워서 연주한 음악. 저절로 눈물을 흐르게 하는 음악. 모든 것이 완벽하고 황홀했다! 마침내 예술의 완성을 본 듯했다.


이 작품은 스승인 생트 콜롱브와 제자 마랭 마레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무수한 물음들과 그 답변들을 보여주었다.




키냐르는 중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그는 장자의 고향인 중국 허난 성의 상추를 방문했고, 고대 중국 철학(도교)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음악가 챙 리엔과 그 제자 포 야의 전설을 다룬 작품「음악 수업」도 썼다.

예술에 대한 키냐르의 생각은 무척 동양적인 것 같다. 그는 명확하고 합리적인 서구의 정신보다,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동양사상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다. 물론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굉장히 다양할 것이고, 그런 다양성 속에서 예술은 더욱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 역시 그러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내 나름대로 예술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머릿속에 반짝 떠오른 느낌이나 가슴 깊숙한 데서 솟아나는 감동이나 감정을, 음악이나 미술, 혹은 문학으로 완전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추상적인 어떤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도전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들이다.

가슴이 품었던 기쁨과 슬픔 등의 다양한 감정을, 손은 어떻게 표현해낼까? 가슴과 손 사이는 얼마나 아득한 거리인가. 가슴에는 수많은 떨림과 진동들이 있다. 그 떨림과 진동 하나하나가 손에 의해 다시 음악이 되고, 그림이 되고, 글이 된다. 가슴이 품었던 감정들을 음악과 그림과 글로 표현해내려는 것은, 불가능성을 가능성의 세계로 옮겨오기 위한 노력, 혹은 몸부림이다. 이런 몸부림이 바로 예술, 혹은 예술 행위일 것이다.


예술을 통해 인간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 어떤 지고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것은 아닐까.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에는 적지 않은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그 고통이 크면 클수록 반대급부로 즐거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즐거움과 고통, 기쁨과 슬픔, 빛과 그림자. 이 모든 대립되는 것들은, 사실은 한 몸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예술은 그런 한 몸에 태어난 것들을 구체적으로 다시 재현하거나 체현시키는 지난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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