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 활동, 완결되지 않은 것, 대오이탈, 가던 방향의 전환······. 이런 것들을 우리는 궁금해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는 데 집중하는 사람은 영감을 맞이할 기회가 없다. 이것이 영감의 비극이고 인생의 비극이다. 우리 또는 대오로부터 이탈해서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궁극의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집요하게 집중해야만 영감이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93쪽)
인간이 지치지 않고 마음껏 펼쳐 나갈 힘을 주는 것이 영감이다. 영감은 무엇인가를 강하게 원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선물이다. (96쪽)
의식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의식을 생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생각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정한 높이에서 작동할 때 그것을 또 시선이라고 부른다.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는 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98쪽)
용기, 모험, 도전이 일어나는 핵심적인 출발장소는 문제의식을 느낀 마음이다. 그런데 문제의식을 느낀 모든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해결하려고 덤비지만 누구는 피해버리기도 한다. 해결하려고 덤비는 사람은 자신이 문제의식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감동’ 한 것이 분명하다. ‘감동’이라는 절차가 없이는 몸이 움직여지기 어렵다. 이 세계를 느끼는 내면의 어떤 특별한 활동성, 즉 감동이 없으면 잘해보고자 해도 잘할 수 없다. (162쪽)
창의는 익숙함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까닭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이다.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이 시작되기 위해서은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라면, 그것은 철저한 탐험의 결과다. (100~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