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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Feb 07. 2024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최진석 지음/북루덴스



평소 존경하는 최진석 교수의 책이라 눈길이 닿았다.

더구나 부제가 ‘최진석의 자전적 철학 이야기’여서 호기심을 느끼며 책을 잡았다.


 그는 2020년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원시의 본연’을 찾는 여정에 제자 두 명과 함께 그가 태어난 고향인 장병도라는 섬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의 제자를 우연히 만나고, 자신의 태(胎)가 묻힌 곳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절을 했다.


 그는 육십갑자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새로운 한 바퀴를 그렇게 시작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혔다.

 프롤로그 제목이 ‘내가 다시 나를 찾은 날’이었다.

 제목이 의미심장했다.

 나도 그 여정에 슬그머니 동참하고 싶었다.


 그는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그의 철학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러 경험과 체험들이 다양한 지층을 이루며 현재의 견고한 철학에 다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라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현재의 정치상황에 관한 여러 가지 철학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의 말에서 개인과 나라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정치상황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을 표하며 나라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의  정치적 성향과는 별도로, 그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가슴이 뜨끔해지는 많은 글들을 만났다. 노자와 장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그는 나 같이 수준 낮은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전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창의적 활동, 완결되지 않은 것, 대오이탈, 가던 방향의 전환······. 이런 것들을 우리는 궁금해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는 데 집중하는 사람은 영감을 맞이할 기회가 없다. 이것이 영감의 비극이고 인생의 비극이다. 우리 또는 대오로부터 이탈해서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궁극의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집요하게 집중해야만 영감이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93쪽)



 - 살아가면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어떤 사실에 대한 긍정이나 답변만으로는 안정적으로 살아온 삶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질문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질문을 잘 던지지는 않는다.

 그가 던진 질문을 내게 해보았다. 당황스럽게도 쉽게 대답을 잘할 수 없었다. 그러자 비로소 나 자신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질문들은 자기 성찰에 이르게 하는 것들일 것이다. 때때로 책은 이렇게 정신적인 충격을 불시에 준다.



 인간이 지치지 않고 마음껏 펼쳐 나갈 힘을 주는 것이 영감이다. 영감은 무엇인가를 강하게 원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선물이다. (96쪽)



- 내게는 ‘영감’이라는 말이 신선한 충격과 자극으로 왔다.

 삶에 있어서 영감은 엄청난 선물이다. 왜냐하면 삶을 지치지 않고 마음껏 펼쳐나가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선물을 받으려면 집요하게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해야 하며, 뜻한 바를 간절하게 원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 글을 통해서 ‘영감의 힘’에 대해서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책은 평소에 내가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서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또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책은 이정표의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책도 사람처럼 어떤 연(緣)이 닿아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의식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의식을 생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생각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정한 높이에서 작동할 때 그것을 또 시선이라고 부른다.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는 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98쪽)


 -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이 말에 전율을 느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시선의 높이를 높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생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도전을 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익숙함은 또 얼마나 편안한 것인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좋아하지, 불편한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시선의 높이를 지향한다면 본능을 넘어서야 할 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좀 더 나은 나를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용기, 모험, 도전이 일어나는 핵심적인 출발장소는 문제의식을 느낀 마음이다. 그런데 문제의식을 느낀 모든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해결하려고 덤비지만 누구는 피해버리기도 한다. 해결하려고 덤비는 사람은 자신이 문제의식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감동’ 한 것이 분명하다. ‘감동’이라는 절차가 없이는 몸이 움직여지기 어렵다. 이 세계를 느끼는 내면의 어떤 특별한 활동성, 즉 감동이 없으면 잘해보고자 해도 잘할 수 없다. (162쪽)



 - 윗글에서, 우리에게 특별한 감동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감동이 올 리가 없다. 뭔가 우리를 자극할 만한 대상을 만나야 한다. 그 대상은 사람, 책, 영화 등등 다양하다. 스스로를 자극하는 대상물을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감동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창의는 익숙함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까닭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이다.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이 시작되기 위해서은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라면, 그것은 철저한 탐험의 결과다. (100~101쪽)



 - 삶에서도 ‘창의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삶도 예술이기 때문이다.

 창의는 익숙함을 넘어서 미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탐험의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 그 미지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는 건 세상의 이치다. 이곳에서 변하지 않으면 저곳으로 넘어갈 수 없다.

 어차피 삶은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나의 의지로 그 변화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나의 삶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 작품을 상상력과 창의성으로 만들어 간다면,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이 될 것 같다.


 이 책의 프롤로그 제목이 ‘내가 다시 나를 찾은 날’이다.

 책을 읽으며 나도 다시 나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영감이라든가 창의성이라든가 감동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고, 그 방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어쩐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서 내 마음대로 책을 읽고 해석한 듯하다. 그러나 책은 열려있는 것이기에, 때로는 저자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으로 독자에게 가닿을 수도 있다.

 그것이 또한 책의 미덕(美德)이기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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