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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May 26. 2020

정밀한 삶을 위하여

  -마음의 고샅길

 최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일이 있었다. 며칠 전 언니의 시어머니가 췌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6개월의 시한부 인생으로 판정되었다. 그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건강해서 120세까지는 끄떡없겠다고, 자타가 인정했다. 그래서 그분에게 일어난 일이 너무 갑작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죽음은 언제나 그렇게 갑작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당사자는 나머지 삶을 어떻게 정리할까? 내가 그런 경우에 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나 모두에게 죽음은 삶의 마지막 통과의례일 뿐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는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할 것 같다.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회상할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 이상 뭐, 더 소중한 것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부귀영화가 죽음 앞에서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는 오히려  사소하고 별 의미가 없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반짝거릴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오래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십 년 전쯤 남편의 직장 안식년(sabbatical year)으로 중국 대련에 간 적이 있었다. 가기 전에 중국어 공부를 약간 했고, 중국에서 어학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의기충천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눈에 이상이 생겼다. 중국 대학병원에 갔더니 황반 변성이라고 했다. 병명이 낯설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심하면 실명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했다. 

 다른 취미는 별로 없고 그저 책 읽는 것만 좋아하던 나로서는 어떤 병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은 상상하기조차 무서웠다. 중국의 의료 수준이 한국과 많이 차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중국어 공부고 뭐고, 삶이 절망으로 어지럽기만 했다. 도저히 중국에 더 머물 수 없었다. 


 남편의 안식년 기한을 몇 개월을 남겨 두고 나 혼자 귀국했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전문 안과 병원에 갔다. 다행히 황반 변성은 아니었고, 망막 전막이라고 했다. 시력이 교정되지 않을 정도로 나빠지면 나중에 수술하면 된다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기운이 쏙 빠지는 듯했다.

 중국에서의 일은 불완전한 의사소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중국 의사의 오진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국 의사한테서 황반 변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에 실명하면 어떻게 될까? 눈앞의 세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풍경들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삶에서 특별하게 중요한 것은 없었다. 다만 평범한 일상이 ‘행복’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삶을 얼마나 낭비했던가. 후회의 감정들이 성난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들었다. 


 한국에 와서 정확한 진단을 받고 나자, 중국에서 받은 충격은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그 ‘행복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일상에 그리 감동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여전히, 삶이 어떨 때는 아주 지루하고 힘들게 느껴진다. 어쩌면 ‘환하게 반짝이는 날들’보다 ‘무의미하고 흐릿한 날들’이 더 많이 내 삶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 무의미함에 저항하기 위해 이따금 글을 쓰고, 글을 쓰면서 그 무의미함을 되새기기도 한다.

 그러나 무의미해 보이는 글쓰기를 통해 삶의 무의미함을 잠시 잊기도 하고,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삶을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고 사유를 해야 한다. 그런 순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다시 한번 일상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삶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종종 그 무의미함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삶이 시작되었으니 결승점까지는 가야 한다. 지금 나는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이 과정에 충실해야 하고, 싫든 좋든 내게 주어진 길을 가야 한다. 

 걸어가는 동안 눈에 들어온 풍경을 놓치지 말고 자세히 바라보아야겠다.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바람과, 등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을 마음껏 음미해야겠다. 태어남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었던 것처럼, 어느 날 죽음 또한 그렇게 나를 데리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삶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하고 싶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이처럼 내 글쓰기는 형편없다. 그래서 글쓰기를 끊임없이 계속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늘 막막하고 서툴 것이기 때문이다. 

 내 삶과 마찬가지로, 이 서툰 게임을 계속하려는 이유는, 글쓰기가 삶을 정밀하게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 들여다봄에서 작은 희열을 느낀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쩌면 내 글쓰기는 자기만족이라는 이기적인 목적에 충실한 행위일 것이다. 


 브런치에 들어오면서, 어쭙잖은 글이라도 써보려고 한다. 이 또한, 부질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익명의 그 누군가와의 소통을 기대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기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련한 인간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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