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 1931~1989)는 오스트리아 작가로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사건의 흐름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소설을 썼으며 스스로를 ‘전형적인 이야기 파괴자’로 지칭했다. 바흐만, 한트케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화자인 ‘나’는 친구인 베르트하이머의 부고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러 간다. 그는 길을 나서며 베르트하이머에 대한 생각에 빠져 들어, 끊임없이 옛 기억을 더듬으며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 끝없는 중얼거림이 마치 친구에 대한 애도인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회한이자, 자기를 잃어버리고 산 28년이라는 세월에 대한 애도처럼 보였다.
‘나’는 28년 전 베르트하이머와 레오폴츠크론 지역에 살면서 호로비츠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두 사람은 거기서 글렌 굴드를 만났는데, 그들은 그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좌절했다. 그리고 글렌 굴드가 바하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서, 피아노를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베르트하이머는 정신과학에 입문했고, ‘나’는 아끼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어느 교사의 아홉 살짜리 딸에게 그냥 줘버렸다. 그리고 스페인의 마드리드 프라도 가에서 은둔하며 에세이 작가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우리는 피아노 대가가 되겠다고 등장했다가 정신과학과 철학 분야를 뒤지고 파헤치는 자들이 되어 황폐해진 것이다. 극단까지 가지도, 극단을 넘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 분야의 천재 하나 때문에 포기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난 생각했다.(17쪽)
과연 천재 한 사람의 출현으로 두 사람은 자신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해왔던 피아노 연주를 포기해버렸을까? 물론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 즉 천재를 보면 좌절감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자신이 하던 일을 접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들 역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모두가 천재일 필요는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생을 노력해도 글렌 굴드의 경지에 절대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했을까, 하는. 혹시 그들은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평가에 매달렸고, 그들로부터 더 이상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좌절감 때문에 음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을까.
음악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행복하지도 못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좋아했던 일을 버리고 달아난 곳에서는 어떠한 정열도 발현될 수가 없었을 것이기에.
그래서 ‘나’의 이러한 독백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베르트하이머가 정신과학이 뭔지 몰랐던 것처럼 나도 오늘날까지 철학적인 것이 뭔지, 철학이 도대체 뭔지를 알지 못한다. 글렌은 승자, 베르트하이머와 나는 패자, 난 그렇게 생각했다.(24쪽)
글렌 굴드는 51세 때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다가 죽었다. 그의 죽음방식조차도 어쩐지 천재의 죽음과 어울리는 듯했다. 베르트하이머는 천재인 글렌이 죽고 나서도 자기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몹시 비통스러워 했다. 그리고 그는 함께 살던 여동생이 몰래 도망쳐서 스위스 남자와 결혼해버린 것을 증오했다. 그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동생이 사는 치처스까지 가서, 여동생 집 근처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나’의 독백은 다시 이어진다.
결국 그 친구는 자신의 실패와 사랑에 빠졌어, 아니 실패에 홀딱 빠져버렸지, 실패하기를 끝까지 고집했어, 그는 자기가 불행하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했지만, 자고 일어났는데 불행이 사라졌거나 찰나의 순간에 불행을 빼앗겼더라면 더욱더 불행해졌을 거야, 그것만 보더라도 그는 진정으로 불행했던 게 아니야, 불행을 통해서 불행과 행복했다는 증거지,(...)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의 불행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치처스까지 가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101쪽)
글렌 굴드를 만난 지 28년 째 되었지만,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여전히 글렌 굴드로부터 자유로워지지도, 달아나지도 못했다. 글렌 굴드는 그들에게 악령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글렌 굴드와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죽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쉰한 살에 자살을 하든 쉰한 살에 자연사를 하든 글렌처럼 죽든 베르트하이머처럼 죽든 상관은 없다.(...) 50년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쉰 살을 넘기고도 더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길이다. 쉰 살에 비겁하게 경계선을 넘으면서 우리는 몇 배로 더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바로 그런 부끄러움 없는 놈이 돼버렸군, 죽은 자들이 부러웠다. 죽은 자들의 우월함이 잠깐이나마 증오스러웠다.(36쪽)
‘나’는 베르트하이머의 자살에 냉소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은근히 냉소적이다.
그리고 다시 ‘나’는 베르트하이머에 대해 생각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책을 출간하려고 했지만, 원고를 수도 없이 수정하는 바람에 결국엔 남은 원고가 없어 책을 낼 수가 없었다. 그가 수정했다는 건 원고를 완전히 삭제해버렸다는 것과 같은 의미여서 몰락하는 자라는 제목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55쪽)
‘나’는 베르트하이머를 이렇게 힐난했지만, ‘나’ 역시 자기혐오가 친구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는 28년 동안 글쓰기에 매달렸지만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못했다. 그리고 글렌에 관한 글을 9년이나 붙들고 있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출판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책이 나오고 나서 오류와 부정확성, 부주의, 딜레탕티슴으로 가득 찬 글을 썼다는 사실 때문에 매일 직면하며 말할 수 없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정도이면 자기혐오가 베르트하이머와 막상막하가 아닌가.
화자인 ‘나’의 독백은 끝도 없이 이어져서 몹시 피곤하고 지루했다. 지치지도 않고, 같은 소리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나’의 끝없는 회상과 독백에 아주 질려버렸다. 그것은 ‘나’의 독백이지만, 자살한 베르트하이머의 독백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실 베르트하이머의 영매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진 독백에서 글렌 굴드에 대한 28년간의 복잡했던 애증의 감정이 독자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었다. 그 고통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진저리가 쳐졌다. 작가는 몰락하는 자의 감정을 독자에게 완벽하게 전이시켰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진정한 작가의 힘이겠지.
베르트하이머는 28년 동안을 회한과 절망과 질투의 곱씹음 속에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질투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었다.
이 작품은 최고가 되고 싶었던 욕망의 좌절, 질투, 부러움, 그리고 지독한 자기혐오로 스스로를 태워 죽인 한 인간의 이야기로 읽혔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했던 자의 비극 이야기.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예술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한 인간을 그렇게 철저하게 몰락시켰던 것일까? 아니, 예술이 그를 몰락시킨 것이 아니라 성공에 집착하는 그의 마음이 그를 죽인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이 예술을 사랑할 수 있고, 예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인정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베르트하이머의 불행은 예정된 결과처럼 보인다.
세상은 다양한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을 삶으로 살아내는 인간들과, 삶을 예술로 살아내는 인간들이 있다. 각각의 인간들은 다 특별한 존재이고, 그들은 어느 누가 더 높지도, 더 낮지도 않은, 모두 평등한 존재들이다. 다만 각각 다를 뿐이다.
‘나’가 생각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런데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며 타인의 삶을 부러워할 때 자기 삶은 부스러지고 파괴되어 버린다. ‘모방자’의 삶은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는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
작품 속의 글렌 굴드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긴 했지만,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천재 글렌 굴드의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봤다. 바하가 평생 불면증에 시달렸던 한 사람을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들어보니 잔잔하게 물결치는 듯한 가락으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듯했다. 이런 음악이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인생을 전복시켜버렸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슬퍼졌다.
글렌 굴드는 연주할 때 입을 벌리고 음악을 따라 부르거나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의자도 직접 가지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서 기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의 연주 모습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었다. 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그의 열정적이고 넋 나간 듯한 연주 모습에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어떤 신비로운 황홀경에 빠져 완전한 물아일체의 경지에 있는 듯했다. 천재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