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울 땐 독서
저자는 머리말에서 ‘영화는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일상을 구원해주는 고마운 중독’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나처럼 바깥을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화는 손쉽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준다. 책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면,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찬란한 색과 빛이 눈을 즐겁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나는 저자처럼 영화에 중독된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되면 즐겁게 보는 편이다. 이 책이 고마운 이유는 볼만한 영화들의 목록이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 날 때마다 한 편씩 야금야금 꺼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간식을 쟁여놓은 즐거움 때문이라고나 할까.
이 책에서 언급된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소수자, 약자, 혹은 낯선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물들을 조명해봄으로써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영화보기와 책 읽기에는 두 세계의 만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감상자의 내부세계로 외부 세계인 책이나 영화가 침투해서 두 세계가 만나게 되고, 그런 두 세계의 조우로 인해 감상자의 세계가 넓게 확장이 되거나, 감상자의 시선이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인생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다고 했다. 그 정도로 영화가 한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강력한 것일까? 그런 궁금증이 생기면서, 책에서 소개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이 책에는 총 28편의 영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내게 인상적이었던 영화 3편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해본다.
첫 번째 영화는 제인 캠피온 감독의 <인더 컷(In the cut)>이다. 이 영화는 행위자로서의 여성, 역사적 주체자로서의 여성,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욕망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게 했다. 저자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섹스에 묶어두었기 때문에,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자기 혁명의 증표가 되어버린다’고 했다. 이 말에서 나는 여성이면서도 ‘여성’을 하나의 완전히 독립된 주제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비로소, 여성이 성적 자기주장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선언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 없이 살았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자괴감이 들었다.
두 번째 영화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 처음에는 제목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원제 ‘Whip lash’를 보고서야 겨우 의미를 알았다. 번역자가 큰 고민 없이 연음으로 이어진 원어를 소리 나는 대로, 붙인 제목에 일말의 분노를 느꼈다. ‘채찍질’이라는 번역이 제목으로 좀 어색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제목은 너무 무성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이 영화에서 나오는 플래처 선생의 교육법이 충격적으로 보였다. 그렇긴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는 그런 방식의 교육법이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영화로 재현된 장면을 보면 객관적 거리가 생겨서인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타인의 인정에 매달려 그들의 의도대로 끌려 다니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만의 인생의 문을 용기 있게 활짝 열었다. 충격적이고 놀라운 반전이었다. 타인에게 끌려 다니던 삶의 사슬을 과감하게 끊어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저자는 이 장면을 보고 타인의 인정이 자신의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영화의 영향으로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 같았다. 와우, 멋지다!
마지막으로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저자가 쓴 이 영화감상의 제목은 <‘착한’ 여자의 ‘나쁜’ 남자 순례기>다.
주인공 마츠코는 여자가 만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나쁜’ 남자를 만난다. 그녀는 나쁜 남자들에게 그렇게 당하고서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피해자가 아니었고 세상과 싸운 여자였다. 그것은 마츠코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본 모습대로 살았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만 있다면 나쁜 세상에도 끄떡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 마츠코는 몸으로 보여주었다.
마츠코는 현실 속에서는 만나기 힘든 인물이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라도 이런 인물을 만날 때, 우리 마음속에 겹겹이 쌓여있던 편견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균열은 새로운, 혹은 낯선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영화는 사실에 기반한 허구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실보다 더 강력하게 진실에 눈 뜨게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가진 진정한 힘이 아닐까.
참고: <위플래쉬>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저자의 ‘내 인생의 영화’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