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성, 시하다

-외로울 땐 독서

by 푸른 오리
KakaoTalk_20200531_153422314.jpg


김혜순 시론 『여성, 시하다』를 읽다가 아래 글을 발견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시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 나에겐 신화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이야기와 시들을 통해 의미를 주던 아버지들로부터 도망쳐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더 내 몸속에서 나오고 싶어 안달인 여자가 있다. 사랑의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여자와 내 몸이 쌍둥이처럼 맞붙어 다시 태어나려는 몸짓, 그 자가(自家)출산이 ‘몸하는’시다. 그리하여 ‘시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 껍질인, 이 외부적으로 관계를 맺는 자아인, 시적 화자인 내가 아니라 내 속의 여자가 나로 하여금 여자를 낳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스스로 산도를 따라 내려오고, 내 몸이 반응하여 열리는 것이리라(...)
아마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속의 어머니를 낳으려고, 여자인 나를 낳으려고, 나는 ‘시하는’가 보다.(11~13쪽)



그녀는, 여성시인으로서의 시 쓰기를 ‘시한다’는 특이한 말로 표현했다. 그녀 내부에는 몸속에서 나오고 싶어 안달인 ‘시’라는 여자 아기가 있고, 이 아기를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가 시 쓰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기는 스스로 ‘산도를 따라 내려’와서 태어난다고 했다. 그녀의 시는 몸으로 쓴 시다. 그녀에게 시는 단순히 쓰는 행위가 아니라, ‘시한다’는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여성시인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바리공주」신화를 거론했다. 「바리공주」의 신화의 주인공은 딸이어서 유기되었고, 신화의 마지막까지 주인공이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김혜순은 ‘바리데기’는 고유명사가 아닌, ‘버려진 아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바리데기는 세 번의 버림을 받는다. 첫 번째는 딸이라서 버려지는(죽는)것이고, 두 번째는 죽음의 장소로 들어가 여행(탐색)하고 결혼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넘나드는 자로서의 영구적인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 번의 부재(죽음)경험이 바리데기의 시적 여정, 여성시인으로서의 나의 시가 ‘시하는’경험들이라고 생각한다.(18쪽)


우리를 둘러싸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름 있는 자들은 이름이 없는 쓰레기에 관심이 없다. 쓰레기는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이며 장애물이다. 쓰레기는 일견 가난한 자, 이방인, 고아, 난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쓰레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27쪽)


「바리공주」신화를 통해서 여성성에 대한 역사적 판단, 혹은 세계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김혜순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시인일 경우, 여류시인이라고 불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남류시인은 없는데 말이다. 이 호칭 하나만으로도 여성으로서의 불편한 입지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외국에서는 여성시인이 어떻게 불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전 세계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근래에 들어와서 여성의 위치가 조금 나아졌을 뿐이다.

잘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영어표현에서 Man은 남자, 사람들, 인류를 뜻한다. Woman은 그냥 여자, 여성, 여인이라는 뜻만 있고, ‘사람들’이나 ‘인류’의 뜻은 없다. 그동안 세계의 중심은 남자였으므로, 단어에도 이렇게 표시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언어도 생명이 있어서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하고 있다. 언젠가는 인류를 나타내는 말 속에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되는, 새로운 단어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혜순은 여성시인으로서의 시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시 속의 ‘내’가 탈주체화된 존재라는 사실, 내가 영토 없는 장소에 머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남성적 동일화의 세계는 ‘내’가 원하던 세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나’는 그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반동일시가 아니라 너의 세계 너머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 단호한 거절이 새로운 시적 언술의 발견의 단초가 된다. 거절함으로써 여성시인은 존재의 취약성 너머 우주적 웅대함을 전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곳을 방황하는 외로운 넋들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여성시인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관계의 비주체적 설정, 익명적 설정, 바로 그 관계 자체, 사이 자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여성시인 ‘나’는 나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어떤 공간을 가동시킨다. 바로 그 공간, 관계 자체와 공감만 있는 공간이 새로운 나의 조국이며 세계가 된다.(41쪽)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녀는 여성이 ‘탈주체화’된 존재로서 자신의 영토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는 이곳 너머의 세계로 너머가 우주적 웅대함을 받아들여 어떤 공간, 관계 자체와 공감만 있는 공간을, 자신의 새로운 세계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시 세계는 여기서 구축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부분에서, 다른 여성시인들, 강은교, 고정희, 김승희, 김정란, 최승자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했다.


여성시는 자신의 말을 상연할 무대를 필요로 한다(...) 강은교는 일인극, 고정희는 극중극, 김승희는 서사극, 김정란은 상황극 혹은 일인극, 최승자는 가족 유령극의 무대를 설정한다. 그 무대에서 여성화자들은 죽음을 여행한다. 유령 화자가 되어, 혹은 유령 화자와 그를 바라보는 관찰자인 다중화자로 분열되어.
여성적 언어가 발화되는 모습은 무당의 말하기와 같은 ‘대신 말하기’로써 실현된다. 대신 말하기를 시도하면, 청자가 시에 개입하는 대화적 구조가 시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기에 여성시의 언어는 구술의 언어다. 강은교는 무당이 신의 목소리로 청유할 때의 시점을 [巫(神)-聽者], 고정희는 무당이 굿 중에 신이 올라 스스로 외치거나 아니면 신의 목소리를 직접 내는 이중 시점을 [神(巫)-聽者] 혹은 [巫(神)-聽者], 김승희는 무당이 자신에게 들어온 신을 해설해주는 시점을 [巫-聽者] 김정란은 무당이 유령의 목소리를 직접 내는 시점이거나 신이 들어온 경험을 서술하는 시점을 [巫(神)-聽者], 최승자는 무당 스스로 자신의 신들린 경험을 들려주는 시점 [巫-聽者]을 구사한다. 이러한 시점들 속에서 여성시가 유령 화자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들의 욕망을 비가시적이나 경계를 넘나드는 무대에서 발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굿의 말하기인 대신 말하기를 통해 이중삼중으로 중첩된 복수 화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 서정시의 공간, 형식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9~190쪽)


김혜순 자신도 위의 여성시인들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공간에 머무는 시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시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지우고 있다. ‘이름’을 넘어서, 정체를 넘어서, 익명으로 번진 ,나는 결국 중첩된 복수 화자의 목소리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시는 ‘나’의 이름을 지우고 가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이름이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시는 이름 아래로 추락한 자의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죽음을 나르고 있기 때문에.

시에서는 ‘내’가 ‘나’를 제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이름으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갔을 때 비로소 시가 시작됩니다.


시는 ‘이름’을 넘어서, 정체를 넘어서, 익명으로 번진 내가 그린 무늬. 그 무늬의 도안. 도안 속에는 어디론가 다시 무늬를 그리며 이행해 나아가려는 동사가 된 형용사들이, 동사가 된 대명사들이, 동사가 된 명사들이 흩어지는 곳. 그 도망의 비밀.


-「시의 이름」,『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동네,2016




많은 여성시인들의 시에서, 시의 목소리가 복수화자의 목소리로 분열되어 있거나, 무당의 ‘대신 말하기’의 형태가 많이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여성들의 문화적· 태생적인 조건이 작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성시인들의 시를 읽다보면, 슬프면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다. 여성들의 척박한 환경에도 요즘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조짐이 곳곳에서 보이는 듯하다. 지금처럼 여성작가들이 꿋꿋하게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나간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의 이런 희망이 그들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혼자서 본 영화/정희진/교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