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에리히 프롬이 1930년대부터 쓴 강연록, 논문, 저서의 글을, 그의 마지막 조교였던 라이너 풍크가 모은 책으로, 국내 미발표작이다. 라이너 풍크는 국제 에리히 프롬 협회 이사로서 에리히 프롬 문헌실을 운영하며, 에리히 프롬 저작물의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고 유고를 관리하고 있다.
서문에서 라이너 풍크는, 이 책에 실린 에리히 프롬의 글들이 ‘진짜 삶’에의 도전을 옹호하는 변론이라고 소개했다.
에리히 프롬의 글은 아래와 같이 전체 7장으로 되어 있다.
1.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2.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3.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4.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5.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6.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7.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책 제목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인데, 그 ‘무기력’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요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무기력하다는 느낌이 계속되고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그런 감정을 조금씩은 경험하며 살고 있겠지만.
책에 소개된 글들은 에리히 프롬이 거의 90년 전에 쓴 것이라고 하는데, 요즘의 사회현상에도 그대로 들어맞아서 그의 혜안에 새삼 놀랐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무기력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진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삶’과 에리히 프롬이 주장하는 ‘진짜 삶’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현대인의 삶이 왜 즐거움과 유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현대인의 기술적 능력과 발명은 자연과 자연의 힘을 지배하려던 인간의 모든 꿈을 거의 실현하였다. 현대인은 예상치 못했던 부를 쌓았고, 그 부로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킬 정도의 가능성을 열었다. 인간이 지금처럼 이 정도로 물질세계의 주인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현대인은 이와 첨예하게 대립되는 특성을 보인다. 가장 우수하고 가장 멋진 사물들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 창조물이 낯설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그와 반목하는 것이다. 사물이 완성되면 인간은 그 사물의 주인이 아니라 시종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물질세계 전체가 인간 삶의 방향과 속도를 지정하는 거대한 기계의 괴물이 된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인간의 손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세계가 되고, 현대인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147~148쪽)
자본주의 사회는 물신숭배의 정신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물질, 즉 사물의 노예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인간은 사물이 아니므로, 스스로 사물이 된다면 자각하건 못 하건 병이 들 것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경고했다. 그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진짜 삶’을 살지 못해서 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 7장에서 그는 진짜와 허울의 차이에 대해서 말한 것 중에 인상적인 글귀가 있어서 옮겨본다.
우리가 나무를 보면서 그것을 완벽하게 인식한다면, 나무의 완벽한 현실, 그것의 본질을 보고 우리의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면 우리의 경험은 나무를 그릴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된다. 경험한 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기술적 재주를 갖추었는지의 여부는 다른 문제지만 화가가 자신의 특수한 대상을 우선 완벽하게 인식하고 그에 맞게 응답하지 않는다면 절대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없다.
이 차이를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해 보자. 순수한 개념적 인식으로의 나무는 개성을 갖지 않으며 그저 ‘나무’종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나무는 추상의 대변인에 불과하다. 반대로 완벽한 인식의 경우에는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벽한 구체성과 더불어 유일성을 간직한다. 그럴 경우 세상에는 나와 인연을 맺고 내가 보고 응답하는 이 나무 한 그루밖에 없다. 이 나무는 내 고유의 창작품이 되는 것이다.(187~188쪽)
윗글은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의 인간관계는 굉장히 피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보통신기기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시공을 초월해서 타인과 소통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결코 ‘양’이 삶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현실에 있어서는 이 다양하고 편리한 매체들은 우리들의 행복에 거의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예전보다 사람들 간의 고립감은 더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정성’이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중심의 사회에서는 세속적인 성공이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세속적 성공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들은 타인들의 평가에 자신들의 행복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타인을 평가할 때 세속적인 성공을 잣대로 사용했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진정성이 결여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의 삶은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은 성공했으나 행복하지 않았고, 이유도 모른 채 자주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 간의 진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은 그런 조건들을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런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면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의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무지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193쪽)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희귀한 것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다음 것을, 지금 하는 일을 끝마칠 수 있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최대한 많은 일을 동시에 한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으며, 그 와중에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194쪽)
그가 말한 삶의 조건들은 단순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절대적으로 결핍되어 있어,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감탄의 능력’은 우리 삶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기 삶의 아티스트가 된다면 무기력하지 않고 활기차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진짜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탄생은 아이가 태아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숨 쉬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단 한 번의 과정이 아니다. 이 사건은 생물학적 인상과 달리 그렇게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다. 신생아는 스스로 숨을 쉬기는 하지만, 단지 엄마 몸의 일부였던 태어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무능력하고 엄마에게 의존한다. 생물학적 발전을 보더라도 탄생은 개별 단계로 구성된다. 시작은 엄마의 자궁을 떠나는 것이지만 그 후로도 엄마의 젖, 엄마의 품, 엄마의 손을 떠나야 한다. 말하고 걷고 먹는 등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는 것은 동시에 과거 상태를 떠난다는 의미다(...) 태어날 준비-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ㅡ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201~203쪽)
남과 다르거나 무리에서 벗어나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글은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한번 뿐인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새겨볼만한 용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