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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난 저런 애들이랑 동물이 제일 싫어.”
“왜?”
말이 통하지 않는 막무가내에,
귀찮게 굴며 떼만 쓰고, 사랑해 달라 조르기나 하고
그랬다. 나는 저런 비슷한 이유로 아이들이 싫었다. 마치 엄마 뱃속에서 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아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거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취업난이 심화되던 시기에 교대에 간다는 건 꽤 괜찮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어느새 10여 년이 흘렀다.
지금의 내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같은 드라마 속 김수현의 다음 대사로 답하겠다.
그래서 좋던데 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신경 쓰이고, 귀찮게 구니까 귀엽고,
사랑해 달라고 조르니까 애틋하고.
이렇게 되기까지 10년이나 걸린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10년간 만났던 학생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했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선생님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이들이 싫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사실이 아니었거나,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일단 내 주변의 말이 통하는 어른들을 떠올려본다.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자기중심적이고 시야가 좁은 어른들은 직장에서, 거리에서, 뉴스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답정너, 갑질, 라테는 말이야. 모두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어른들로부터 비롯된 표현이다. 지식과 경험은 더 많을지언정 마음은 닫혀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반대다. 사회적 의사소통 방식에 익숙하지 않을 뿐, 마음은 열려 있다. 대여섯 살 아이조차도 무작정 화를 내기보다 찬찬히 시간을 들여 눈을 맞추고 설명을 해주면 납득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하는 법을 배워간다. 어휘의 한계와 발달 단계적인 특성 때문에 소통에 에너지와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등학생만 되어도 의미와 마음을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보내는 작은 몸짓과 눈빛 속에서 비언어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은 흥미로운 도전이자 배움이었다.
아이들은 귀찮게 굴며 떼를 쓴다.
때때로 사실이다. 1, 2학년 아이들의 같은 말 반복하기 스킬은 엄청나다. 물어본 것 또 물어보기도 핵심 스킬 중 하나여서 가끔은 네, 아니오 팻말을 만들까 생각도 한다. 4학년까지도 아이들은 학교에 오면 시시콜콜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들어댄다. ‘선생님~ 제가요~ 어제요~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로 시작하는 대화를 듣다 보면 과대 포장된 택배를 뜯을 때만큼이나 허무할 때가 많다. 대부분은 어제 일기를 못 썼다든지, 저녁에 치킨을 시켜먹었다든지의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표현임을 알게 되면서 그런 쫑알거림이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너무 말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내가 먼저 말을 걸거나, 말을 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기도 한다. 괜히 방탄소년단 노래를 튼다든지, 슬그머니 미소를 보내기도 한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결국 서로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말을 걸고, 감정을 살피고, 남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나야말로 그 과정이 귀찮았던 것 같다. 혼자 있는 것이 편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만큼, 타인에게서 어떤 영향도 받고 싶지 않았다. 어리고 오만했던 나는 세상을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아이들은 사랑해 달라고 조르기만 한다.
선생님이 되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사랑을 많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준다는 건 때로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소중한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며 나도 모르게 머금는 미소와, 상대방의 표정을 상상하며 손편지를 쓸 때 두근거리는 마음이 그 증거다. 내가 준 배려와 애정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행복인지! 하다못해 내가 소개해준 맛집이 진짜 맛있었다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하루가 뿌듯하다.
과거의 나는 주는 즐거움을 몰랐다. 사랑을 받고만 싶었다.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도움을 주고, 기쁨이 되는 행복을 몰랐다. 그래서 나처럼 사랑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싫었다. 받기만 해도 부족한 사랑을 누구에게 준단 말인가.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니 그렇지가 않다. 아이들은 사랑해달라고 조르기만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야말로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존재들이다. 순수한 마음을 아낌없이 주곤 한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콧등이 시큰하고, 눈두덩이가 뻐근하고, 마음속 깊이 선생님 되길 정말 잘했구나 생각하곤 한다.
내가 아이들을 싫어했던 것은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때문이었다. 경험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편협한 마음, 관계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싶지 않았던 게으름과 오만함, 그리고 사랑받고만 싶었던 이기적인 마음. 나는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선입견을 싫어했다. 그리고 지금 내 생각은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2020년의 반이 넘게 지나갔다. 코로나 19 때문에 교실 수업은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고, 등교 개학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출석하지 않았다.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을 여덟 번 만났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여름방학을 맞이한 우리 반 아이가 두 명 있다. 길에서 만나도 무심결에 지나치고 말 거라 생각하니 씁쓸하다. 홀로 교실에 앉아 수업 영상을 만드는 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텅 빈 교실을 보면 아이들이 만들어낸 빈자리가 무척이나 크다.
들려주고 싶다. 아이들의 얼굴보다 모니터를 마주하는 데 익숙해져 가는 나에게, 굳이 학교에 가야만 하냐고 묻는 이들에게, 학교에 대한 보통의 추억을 가진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다. 학교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교실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과 경험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서툰 내가 아이들과 만들어낸 행복하고, 황당하고, 때로는 애처로운 기억들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