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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가의 다락방 Jun 04. 2024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을 읽고

자의식의 부피를 줄이기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시대에 ‘작은 자아’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자의식의 축소를 곧 구원이라고 여겨온 나는 이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 책의 감상을 단편적으로 나열해 보려 한다.

 

#1

 

한때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말 때문이었을까.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일과를 마치고 샤워를 하는 시간이다.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보면 온몸에 묵은 때처럼 달라붙어 있던 우울감이 씻겨져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모든 것을 가르는 경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비록 연결된 구조가 다르긴 하지만, 나도,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도 결국엔 분자로 구성된 것 일터. 그런데 나는 왜 나를 구분된 존재로 여기는 것일까, 인간이 경계를 인지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많은 사람들에게 샤워 타임은 사색에 잠기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유를 발견했다.

 


“물속으로 들어간 지 몇 분 만에 나는 우리가 물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 존재는 변한다. 우리는 그곳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저 중력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물이라는 환경이 우리에게 친숙하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의 60퍼센트가 물로 구성되어 있으니 바닷속 환경에 흡수되거나 최소한 흡수된다고 느끼기 쉽다는 게 이해가 된다. 우리 주위에 흐르고 있는 해류가 우리 혈관의 피와 조화를 이루며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잠수한 물속의 입자들을 인식한다... 우리는 물속에서 주변 환경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p.144



이처럼 이 책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때로는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자의식을 축소할 방법을 탐구해 온 저자가 남긴 기록이다. 자아를 최소한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신조에 따라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표현하기를 택한 저자 덕분에 행간에 숨겨진 의미가 많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2

 

“왜 하필 소련사를 공부했어요?”

 

소련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 이런 질문을 받지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색한미소를 지으며 답을 피했다. 상황을 모면하고 나면 늘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 미국사였어도 저런 질문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솔직하고 명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괜히 심사가 뒤틀렸던 것 같다.

 

결국 고정된 자아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역사에 흥미를 느꼈던 까닭을 환기할 수 있었다. (나의 인생 책인) 까뮈의 <전락>에서 쉴 새 없이 독백을 늘어놓는 사내는 이렇게 말한다. “내 열정은 항상 나를 향해 있었고 감동 또한 나와 관련된 것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적어도 하나의 큰 사랑에 몰두했었고, 그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까뮈는 작가의 말에서 “어디서부터가 고백이며 어디서부터가 남들에 대한 고발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시대를 심판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내가 <전락>에서 발견한 것은 나, 그리고 현대인의 초상이었다. 현대인의 비대한 자아를 뒷받침하는 사회문화적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 내 역사 공부의 목표였다.

 

그럼 왜 하필 사회주의의 역사냐. 소련사에서는 집단의 목표, 역사적 대의 속에 기꺼이 용해되면서도 이를 희생이라 칭하지 않는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소련을 ‘전체주의’ 사회라 부르는 사람들이 쉽게 상상하듯, 국가가 사회와 개인을 늘 압도했던 것은 아니다. 소련에서도 자아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미묘한 변주 과정을 거쳤다. 대외적 위협과 계급의 적, 인민의 적에 대한 공포가 극대화되었을 때는 ‘자아’의 표출이 금기시되었으나, 계급억압의 종식이 선포되었을 때 당국은 오히려 혁명의 세례를 받은 개개인이 자의식을 표출하기를 원했다. 그게 소련의 문화적 선진성을 입증할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여튼 이렇게 지금과는 다른 자아상이 자리 잡고 있었던 사회를 공부함으로써 자의식의 부피를 줄일 단서를 찾는 게 내 목표였다. 인정받으려 몸부림치고, 좌절당한 인정 욕구 때문에 비뚤어지는 찌질함이 고정불변하는 인간의 특징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늘 하고 있었던 생각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역사 공부를 택한 나의 내적 동기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사실 고민은 많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현대인의 자의식을 ‘낯설게’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결국은 자의식의 물적 토대를 타깃으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은 이런 고민까지 해결해 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다만 이런 고민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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