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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빛 활동이 내게 남긴 것들

‘지금, 여기’를 살기 위한 기록

by 올가의 다락방
“사람은 몇 가지 익숙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두세 가지의 생각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10년이 걸린다. 사실 이건 좀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서 세계의 아름다운 얼굴과 어떤 식으로 친밀해지는 이점을 얻는다.” 까뮈, <결혼, 여름>


누구나 자신의 삶을 가로지르는 화두를 가지고 산다. 어느 정도 자의식이 형성된 이후로, 내 삶의 가장 큰 화두는 ‘구원’의 문제였는데, 나에게 구원이란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자괴감과 쾌락을 극복하고 삶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아라는 이름의 왜곡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볼 때, 내가 얻게 되는 것은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의식의 부산물들은 사람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병든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내 평생의 목표는 자의식의 경계를 부수고, ‘나’라는 틀에 갇혀 있을 때는 얻을 수 없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런 목표는 ‘나’라는 존재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만들었다. 자아는 의식되는 순간 몸집을 키우기 마련이니까.

짧게나마 했던 사회 운동도, 공부도 모두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시작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자본주의와 ‘자기 완결적이고 독립적인 자아’라는 서구의 자아 패러다임이 만나 ‘자의식’이라는 감옥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대해지는 그 의식 속에서 현대인들은 점자 억압받는다는 자각조차 잃고 있었다. 모든 게 ‘내 자유로운 선택’으로, ‘자기 서사’로 수렴되니까. 그래서 다른 사회를 만들고 싶었고, 지금과는 다른 사회에 대한 공부를 통해 그 가능성을 점쳐보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한 소련의 역사에 대한 공부는 그러한 맥락에서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소비에트 사회에는 자기보다 더 큰 역사적 사명을 위해 스스로를 내던질 줄 아는 초월적 자아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고, 큰 자괴감을 느꼈다. 허망함은 오래된 문제의식조차 용해시킬 만큼 강한 농도로 내 삶에 육박해 들어왔다. 그때즈음 시작한 게 말빛 활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빛 활동을 시작한 동기와 이유를 물었다. 스스로를 관찰하기 좋아하는 사람답게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곧잘 자기 서사 위로 배치했던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어 늘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은 내가 그토록 바라온 구원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광활한 자연환경 앞에서 자기 존재를 잊는 인간처럼, 말빛 활동을 하면서 나보다 큰 거대한 역사적 격변의 순간들이 나를 통과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게 쓰디쓴 진실을 하나 알려주었다.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잊는 것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이 내게 남긴 의미를 간단하게 되짚어보려 한다.

나는 12.3 내란과 윤석열 퇴진 투쟁이라는 역사적 격변과 관련해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싶어서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했다. 훗날, 기억의 편린과 잔상처럼 남을 이미지들로 광장을 비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은 개개인의 시간이 멈춘 곳에 고이기 마련이다. 점처럼 흩어진 기억의 웅덩이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했을 때 탄생하는 것은 자기 서사의 이미지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러한 주관적 진실이 아니었다. 때문에 최대한 정확한 기록에 의존하고 싶었다. 기록은 그 자체로 발언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발언은 현장에 있는 청중들, 즉 같은 시간대에 위치한 사람들을 향한 외침이다. 하지만 그 발언이 하나의 사료로 기록될 때, 청중의 범위는 시공간을 초월해 무한히 확장된다. 이처럼 내가 말빛 활동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역사를 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이었다.

또한 나는 말빛 활동을 하면서 역사 공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었던 자기 초월적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발언을 기록하면서 인간을 ‘이기적으로 합리적인 개별 주체’로 보는 서구의 자아 패러다임에 금이 가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광장을 계기로 그동안 낯간지러워서 입에 올리지 못했던 ‘양심’이란 단어가 엄청난 무게를 지난 공동체적, 역사적 감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예비 노동자이기에,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연대하는 게 아니라, 옳은 일이기에 연대한다는 ‘양심’이라는 감각은 과거로까지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니, 산 자는 죽은 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선언은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기대고 있는 선형적 역사관마저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시대적 격변 속에서 초월적 자아들이 출현하는 것을 보며 나는 누군가의 말을 내 말에 앞세우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공 지능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발언을 기록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감각을 내 몸에 기입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자의식이라는 이름의 유령은 그렇게 쉽게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발언을 기록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나의 형상-내가 어떤 의제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광장을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 향후 주요 과제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등등이었다. 그게 몇몇 인터뷰 요청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이유이기도 하다. 엄청난 관심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말빛 활동의 중심에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건 내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기록을 시작한 최초의 목적과 그동안 내가 쌓아 올린 초월적 감각이 무너져 내려가는 게 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차에 내가 최초로 기록한 발언을 다시금 읽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입니다. 앞서 발언해 주신 분이 언급해 주신 전태일 열사의 말처럼요. 저는 알바를 구하다 아빠뻘의 남성에게 성희롱을 당한 여성이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동안 몸만 멀쩡한 병신이라고 모욕당한 장애인이고, 해외에서 휴게시간과 최저시급을 보장받지 못하고 취업할 뻔했던 이주노동자고, 2030 여성과 2030 남성 바깥에 있고 싶은 통계 밖의 성소수자고, 물류센터에서 일하다 허리뼈에 금이 가서 차라리 쿠팡이라도 가라는 말에 몸서리치는 노동자이고, 비정규직 경력자를 박대하는 병원의 인력 운영 때문에 역할 밖의 노동을 해야 했던 파견근로노동자이고, 정상성을 강요하는 공간을 견딜 수 없어 도망쳐 나온 학교 밖 청소년이었고,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던 가정폭력 피해 아동이었고, 반기후적인 세상에 저항해 왔지만 집에서는 고기 먹길 강요당하는 채식 지향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일부를 합친 것이 저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당사자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언제나 개별 존재에게만 할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1/3, 한강진역 관저 앞, 한 익명의 청년 발언


이 발언에 무슨 말을 더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 청년의 발언을 곱씹으며 보편은 개별 존재의 가장 깊은 진실에서 생겨난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되었다. 이번 광장이 내게 알려준 가장 강력한 진실은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앞으로 광장의 시간을 애써 부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광장의 압도적인 역사적 경험과 말빛의 아름다운 기억이 내게 남긴 것이 일견 볼품없어 보이는 나에 대한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보편으로 나아가는 열쇠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고, 무아無我로 나아가기 위해서 아의 세계로 깊숙이 닿아야 하며, 역사로부터 무언가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한다. 말빛 활동은 그 모든 모순 속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진다 @jinhan_kanjari (x, 구트위터)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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