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동물사>는 근현대 유럽, 미국, 동아시아 등지에서 여러 동물과 인간이 맺었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권리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책이다. 훌륭한 소개글이 워낙 많이 나와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이 나에게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벌거벗은 동물사> 덕분에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역사학의 효용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의 오랜 질문은 아래의 유명한 글로부터 탄생했다.
“거미는 직조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것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릿속에서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상>, p.237)
나는 마르크스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해 남긴 글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역사유물론의 주춧돌에 해당하는 ‘인간 노동’이라는 개념에 낡은 종차별적 함의가 내포된 건 아닌지, 인간과 동물을 구별지음으로써 성립되는 개념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닌지와 관련해 반성과 성찰이 이어졌다. 노동이 인간의 특수한 목적의식성에 의해 완성되는 개념이라면 노동해방이란 결국 비인간동물을 배제하는 대의가 아닐까, 고민하다가도 이러한 고민이 과거 나의 행보와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소심하게 뒤로 물러섰다.
이제는 용기를 내어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 차에 운 좋게 <벌거벗은 동물사>를 만났고, 책을 덮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텍스트 속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이 동물사라는 낯선 세계로 나를 초대해 준 덕분에 나는 나의 사고를 짧게나마 몰역사화된 우물로부터 길어 올릴 수 있었다. 특히 아래의 글이 추진력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끝으로 동물사는 동물의 행위능력만큼 인간의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동물사는...인간 중심적인 연구지형에 비인간적인 변수를 강하게 기입하는 역사학 분과임에는 틀림없습니다...그러나 행위능력의 측면에서 동물을 높이고 인간을 낮추는 것이 인식론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실존적·윤리적으로는 오류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과 다른 동물에게 해를 가하는 역사적 구조를 만들었던 책임은, 이를 극복하고 더 호혜적인 다생물종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결단과 책임은, 인간과 다른 동물이 나눠서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비인간동물을 더 가시화하고 지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일종의 ‘공론장’에 끌어들이는 노력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더 무해한 인간-동물 관계, 여러 생물종에게 더 살만한 공동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은 인간이 결자해지해야 할 몫이 큽니다.” pp.167-8
저자의 말처럼, 그동안 가려져왔던 비인간동물의 존재감을 가시화하기 위해 동물과 인간의 행위능력을 기계적으로 동일시하다 보면 세계가 인간중심적으로 구조화되는 데 있어서 인간이 해온 역사적 역할이 흐려질 수 있다. 기울어진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저자의 이러한 깊이 있는 통찰을 끝으로 동물사로의 외출을 마무리하고 돌아와보니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꿀벌은 건축가를 부끄럽게 할 만큼 정교한 집짓기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자의적으로 위계화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양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인간의 건축 능력이 더 훌륭해 보일 수 있지만, 정교함과 속도를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과 벌 중 누가 더 우월한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 중 누가 더 뛰어난 지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목적의식적으로 건설한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착취관계, 그리고 이로 인해 비틀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는 인간이 책임지고 바로잡아야 한다. 인간을 해방의 주체로 호명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더 많은 역사적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지나친 선해로 보일 수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심중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알길은 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인간이 동물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감정’을 고려하며 어슴푸레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내린 ‘해맑은’ 결론과 희미하고 어둑한 짐작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힘이 바로 역사학에 있다. 시대적 한계를 고려할 때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비인간동물에 대한 섬세한 인식 속에서 탄생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유의미한 맥락과 교훈을 건져올리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몫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우물 밖, 즉 다른 시공간으로의 이동이 필요하다. 낯설게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역사학이다. 동물사는 그 자체로 역사학의 빛나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우물 밖으로 멋진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벌거벗은 동물사>가 훌륭한 도르래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