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시대와 죽음의 윤리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를 읽고

by 올가의 다락방

본 글은 로이 스크랜턴의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시프, 2023)를 읽고 느낀 단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1. 기후 문제는 체제의 문제다!


서문과 1장(인간적 생태학)에서 저자는 탄소 연료에 기반한 지구적 자본주의로 인해 인류 문명의 종말은 기정사실화되었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문명 전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다소 비관적인 주장을 한다. 그리고는 2장(사악한 문제)에서 지구적 탈탄소화를 위한 제도가 실현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짚으며 인류 문명을 구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이미 지났다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사실 1장을 읽으면서는 반발심이 느껴졌는데, 2장을 읽으면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일상과 인권과 존엄을 떠받치고 있는 게 탄소라는 것을 실감 났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막대한 이윤을 얻는 자본가들과 무고한 인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상당히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그 ‘무고한 인민’들이 어느 정도 안정된 사회보장제도 속에서 직업적 성취를 느끼고, 여가를 즐기고, 건강한 삶을 보장받는 데 필요한 것도 탄소 경제이고, 그 모든 걸 한 번에 박살 낼 수 있는 것도 탄소 경제이다. 풍력과 태양열 같은 대체에너지로는 “인공호흡장치가 작동하거나 경보음을 울리거나 서버들이 데이터를 고속 처리하거나 하는” 시스템도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므로 탄소 경제가 흔들려 실업률이 높아졌을 때 거리에 나와야 하는 것도 인민이고, 탄소 배출량이 높아져 지구가 뜨거워질 때 거리에 나와야 하는 것도 인민이다. 우리의 일상과 삶의 질은 탄소 연료에 기반한 지구적 자본주의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있다. 이때 해결 방법은 단 하나다. 탄소 배출량 자체를 국가나 자본가가 아니라 인민과 사회가 통제할 수 있는 체제로 나아가는 것, 최소한 우리 삶의 조건을 우리 손으로 통제할 수 있는 체제로 나아가 보는 것. 그런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건 혹독한 빙하기를 살아낸 인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끝을 보려면 뭐라도 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기후 문제는 체제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2. 우리는 모두 소비자!


3장에서 저자는 투쟁의 한계를 지적한다. 석탄이 주요 원료였을 때는 광부들에게 생산을 멈출 힘이 있었기 때문에 조직화된 노동 운동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지만, 석탄이 석유와 가스로 대체되면서 생산자는 소비자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규모 집회나 행진이 석탄 문명 때만큼의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저자는 2014년 유엔기후정상회의에 앞서 실시된 기후변화민중행진을 예로 들었다. 30만 명이 집결했지만, 정확히 무엇에 맞서 싸울 것인가가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행진은 그저 소속감과 자기 만족감을 주는 축제로 끝났다.


이는 거리 위 민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같은 시간 하버드 클럽에 모인 전력산업 엘리트들과 이후 유엔에 모인 정상들이 어떠한 구속력도 없는 제도에 대해 알맹이 없는 토론을 하다가 흩어지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즉,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외교관, 에너지 기업 경영진, 투자자, 과학자, 무정부주의자, 성직자,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이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고 있고 시급히 뭔가를 해야 할 필요”(pp.107-108)를 느끼고 있지만, 모두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할 뿐, 실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고안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활동가의 어리석음과 유엔 정치가의 이기심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는 데 있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p.110)


3. 문명의 일원으로서 의미 있게 죽는 법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지금까지의 내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내가 했던 것과 하고 있는 것—역사학 연구와 인문학 책 만들기가 갖는 의미를 실감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 존재를 인정해 주었고, 앞으로도 이 책이 인정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사명감을 내게 불어넣어 주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마지막 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책 만드는 일을 하시는 분들, 혹은 인문학을 공부하시는 분들께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를 적극 추천합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은 키케로에게서 온 것이다. 키케로는 학문과 사유를 우리 자신에게서 영혼을 끄집어내는 행위,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이건 플라톤에 대한 키케로의 재해석이다. 플라톤은 ”철학이란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하는 법을 배우는 실천“이라 규정했다.


개인뿐만 아니라 문명의 죽음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순히 체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역사와 집단의 역사를 동기화한 후에, 그 총체적 기억 속에서 반드시 전승되어야 할 것들을 개념적 사유의 틀 속에서 단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물리적 세계로부터 문명이라는 영혼을 분리해 저장 가능한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인 셈이다.


기억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개념화한 뒤, 그것에 시의성과 더불어 미래에도 통할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 그리하여 과거가 현재를 살아남아 미래로 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문학의 몫이다. 따라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또 문명의 일원으로서 의미 있게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일 수밖에 없다. 책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책이 단 한 권도 남지 않는다고 해도, 책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문명이라는 이름의 영혼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강하게 단련된 영혼은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문명의 종말이 곧 인간 전체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세계가 파멸된 후에도 누군가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지속될 것이다. 끝내 살아남은 인류에게 문명이 종말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며 쌓은 지식과 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현대 문명의 종말을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인문학의 운명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