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덕지덕지 묻은 인연들을 좋아한다. 내 인생에서 장장 15년에 달하는 학생이라는 신분 동안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두터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스승은 대학교 때 전공 교수님이다.
교수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역 없이 다양한 분야에 두루두루 지식을 갖추고 계셔서 교수님의 이야기는 뭐든 흥미롭게 듣는다. 게다가 생각의 흐름 저변에는 언제나 짱짱하게 잘 짜인 논리가 있고 그 생각을 표현할 화려한 언변까지 갖추고 계신다. 누군가의 생각 그리고 감성이 멋진 게 뭔지 아는 어른. 신들의 신인 제우스처럼 문과생 중의 문과생이 있다면 그건 교수님일 거다. 그 와중에 인간미도 풀풀 넘치신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른의 모습이지만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신다. 가끔 그런 모습을 보면 흠칫 놀라 잠깐 실망하려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없는 안도와 공감을 느끼고 결국은 응원하게 된다.
교수님은 친하게 지내는 제자가 부탁하면 종종 결혼식 주례를 해주시곤 한다. 주례사가 거의 없어진 요즘이지만 어디 가서 주례사가 있으면 한숨부터 나온다. 특히 목사님이 진행하는 철 지난 신랑 신부의 역할을 읊는 따위의 주례란 귓구멍을 막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날의 결혼식은 교수님의 주례라서 내심 기대가 컸다. 내가 아는 교수님은 주례를 허투루 하지 않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주례는 교수님의 일상 이야기로 시작됐다. 제주도에도 거처가 있는 교수님은 비대면 수업 덕분에 자주 제주에 내려가실 수 있었다. 제주에 오래 머무는 김에 유튜브와 블로그를 동원해 어설픈 솜씨로 귤나무를 잔뜩 심으셨는데,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갔다가 다시 제주에 내려와서 깜짝 놀라셨다고 한다. 들어가는 길부터 귤 향이 폭발하며 귤꽃이 만개해 있었던 것이다. 너무 기뻐서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꽃 사진을 가득 찍고 가족들에게도 자랑하고 행복을 느끼셨다. 그러나 다음 방문 시 허망하게도 귤꽃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없어진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여기까지 귤나무 이야기를 하시곤 신랑 신부에게 말했다. 어떤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이 절대 끝이 아니니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은 두 사람에게 아주 기쁘고 좋은 날이지만 결혼한다는 것이 옆에 있는 사람과의 영원한 완성이나 결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계의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이 주례는 몇 없는 경험이지만 들었던 주례중 최고였고 내가 교수님을 좋아하는 이유 그 자체였다.
오래된 벗 중에 교수님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친구가 몇 년 전 내 생일에 선물한 시집이 있는데 거기에 그가 적어준 문구가 있었다. '마땅히 비루한 순간들에 언젠가의 행복을 예비하였듯이, 마땅히 행복한 순간에 언젠가의 비루함을 예비하길 바라.' 행복한 기운만이 감싸는 생일에 받은 이 문장은 오래도록 나에게 물음표였다. 몇 번을 곱씹어도 어떤 뜻으로 적은 생일 축하 메시지일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따로 물어보진 않았지만 머릿속에 박혀 둥둥 떠돌았다. 그러다 교수님의 멋진 주례를 들은 날 신기하게도 그 문장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시집을 받으며 생일 축하를 받았던 시절은 나에게 행복이 차고 넘치던 때였다. 그렇게 행복만 가득할 것 같은 인생에 이후엔 코로나라는 시기적으로도 동시에 개인적으로도 우여곡절이 생겨났다. 행복할 때엔 그 행복을 과신하고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져 허우적 대느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충만하게 행복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순간을 떠올리며 마음을 쓰는 일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야 뒤늦게 그 친구의 선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