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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옥 Nov 22. 2021

올리브나무 사이로

학교에서 나와 만난 나의 아이들에게

 13. 글 잘 쓰는 정호

 오늘은 정호 이야기를 해 본다. 내가 교사가 되어 처음 교지를 만들었을 때 정호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학년 시작 전에 교사들이 모여, 수업 들어갈 학년과 담임을 정하고 (이것은 주로 교장, 교감 선생님이 교사들의 의견을 듣고 정한다.) 수업시간을 나누고, 행정업무를 나누고, 행정업무 외에도 교사가 꼭 해야 할 일들을 협의하고 역할을 나눈다. 국어과에서 해야 할 일은 백일장 개최, 독후감 발표대회, 교지 만들기, 논술대회, 학교도서관 사서 역할, 도서관에서 밤새워 책읽기, 졸업식 송사 답사 관장하기, 연구수업 하기 등이다. 

 내게는 그해 연구수업이나 교지 만들기 중에 선택하라고 해서 교지를 만들기로 했다.

문예반 2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 년에 걸쳐 차근히 준비하였다. 방학 중에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교지 만드는 데 성심성의를 다하였다. 정호가 그 팀장이 되어 애를 많이 썼다. 

 정호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짓기도 잘하였다. 교지에 들어갈 삽화를 전부 정호가 그렸다. 정호는 지역 백일장 대회에 나가, 시를 쓰면 장원 입상을 하곤 하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여학생들이 좀 더 성숙하여 글을 잘 쓰기 때문에 남학생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내가 근무한 학교는 남자중학교였기에 정호는 매우 독보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성실하여 반장도 하고 공부도 잘하였다.     


 세월이 7년쯤 흘러 우연히 대한극장 앞에서 정호를 만났다. 나는 영화 「플래툰」을 보려던 참이고, 정호는 그 길옆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의과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지만 정호는 늘 행복한 아이였기 때문에 계속 시를 쓰기보다는 다른 일을 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 무렵에 나는, 시를 쓰려면 마음에 좀 균열이 있어야 한다는 편견을 가졌었다.     


 요번에 내가 시집을 발간하게 되면서 정호 생각이 떠올랐다. 

- 선생님이 드디어 시를 쓰고 출간하게 되었어. 

라고 기쁘게 전하고 싶었다.     

 혹시나 해서 정호가 입학했다는 의과대학의 부속병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거기 정호가 있었다. 얼마만인가. 사진만 보아도 반가웠다. 어쩌면 정호는 이제쯤 나를 잊어버렸을 수도 있는데. 그 의과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도 있었다.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의사로 진료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의과대학 홈페이지의 사진은 어렸을 때의 모습과 좀 더 닮았다. 시집이 나오면 한 권 보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을 품는다.          

 14. 메뚜기볶음 반찬     

 그해에 나는 야심차게 운동장쪽 창가에 길다란 화분을 몇 개 놓고 상추를 심었다. 아이들이 당번을 정하여 열심히 물을 주곤 하였더니 연두빛 싹들이 오그르 돋아나고 어느덧 쌈 싸 먹을 만큼 자랐다. 하루는 상추를 몽땅 뜯어 점심시간에 상추쌈 파티를 하였다. 이것도 연극을 단 한 번 했듯이 한 번에 그치고 말았지만 행복한 추억이었다.     

 

 도시락에 얽힌 재미있는 추억이 하나 더 있다. 점심시간에는 담임이 점심을 먹기 전에 교실에 올라가 아이들 도시락 먹는 것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일과 중 하나다. 맛있는 반찬도 한 점 집어먹어 보기도 하면서. 그날도 교실에 올라갔더니 교실 한쪽에 아이들이 모여 웅성웅성한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까이 가 보았다. 한 아이가 메뚜기볶음 반찬을 싸 온 거였다.      


 우리 어렸을 때는, 특히 시골에서는 먹을 간식거리가 없으니 아이들은 들에 나가 메뚜기를 잡아다 볶아 먹는 것은 예사고 어떤 아이들은 개구리 뒷다리, 참새도 구워 먹곤 하였다.

 나도 메뚜기는 많이 먹어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메뚜기에게 잔인하게 군 게 좀 미안하기도 하다. 잡아서 빈 소주병에 담기도 하고 (이건 그래도 괜찮은 방법이었고), 빈 병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강아지풀을 뽑아 그 긴 줄기에 메뚜기를 잡는 대로 등줄기를 뚫어 주욱 꿰었다. 살아있는 놈의 등줄기를 꿰다니. 그때는 그런 행동에 아무 느낌도 생각도 없었다. 그저 메뚜기나 많이 잡을 생각을 했다. 볶아 먹으면 고소했으니까.     


 메뚜기를 이렇게 잡아다 예사롭게 볶아 먹는 일은 이제 아득한 예전의 일이고, 더군다나 여기는 서울 도심지라 메뚜기를 구경하는 일조차 드문데, 메뚜기볶음 반찬이라니. 아이들은 무슨 신기한 일이나 일어난 듯이, 혹은 야만인을 본 듯이 웅성거린다.

- 아! 메뚜기, 메뚜기 원래 이렇게 볶아 먹는 거야.

 나는 그 중 한 개를 집어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물론 먹어본 지 아득한 오래라 별로 먹고 싶지 않았지만, 먹어본 적 있는 일이니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상황은 바로 끝났다. ‘선생님이 저걸 먹다니, 먹어도 되는 건가 보다’라는 안도하는 얼굴들을 하고 모두 제자리로 간다.      

                                       

 15. 그리운 환이     

 우리 반 반장 환이는 온순하고 성실하며 아이들에게도 다정하여 많은 아이들이 좋아하였다. 그런데 별명이 ‘거북이’였다. 혹시라도 칠판에 글씨를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얼마나 느리게 쓰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다. 그 느린 속도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 재미있는 특징을 가진 환이는 책임감이 높고 담임을 배려하는 마음도 깊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해에 나는 결혼을 했고 생활이 복잡해져서 아마도 학급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해지지 않았을까 염려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만약 그랬더라도 환이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것이 괜찮았을 것이다. 환이에게 감사하다.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이 결혼 선물로 준 청동 고니인가 (기러기인가?) 한 쌍이 아직도 우리 집 탁자 위에 사이좋게 놓여 있다. 그동안 육아라든가 여러 가지 형편상 참으로 많이 이사를 다녔는데, 38년 동안이나 내 곁을 지키고 있다.   

                                     

 16. 첫 학교의 기억 마무리     

 첫 학교의 기억을 마무리해야겠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인지 세월의 저편 가장 먼 기억인데도 가장 생생히 떠오르고 그 무수한 나의 학생들이 그립고 생각이 난다. 대부분 가정이 참 어려웠었는데 다들 잘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창훈이, 원래 담임이 4월에 학교를 그만두면서 내가 중간에 담임이 되었는데, 전 담임이 전해준 바에 의하면, 학급의 반장, 부반장, 학습부장 등 임원을 모아놓고 ‘반 수업에 들어오시는 선생님 중에 담임을 하고 있지 않은 국어 선생님과 한문 선생님 중에 누가 담임을 하면 좋겠는가.’ 의견을 물었다 한다. 나는 첫 발령을 받은 신참내기로 다른 반 국어 수업을 하면서 그 반에는 일주일에 한 시간 한문을 지원하고 있었다. 국어는 나보다 나이가 20살쯤 더 많은 어느 여선생님이 맡고 있었다. 아이들은 ‘젊은 선생 좋아라’ 하여 모두 나를 지목하였는데, 창훈이만 나이 드신 그 국어 선생님이 좋겠다고 했단다. 나는 신참이라 억센 2학년 남학생들 다루기가 어려울 거라고.

 결국은 수업시간을 바꿔가면서까지 내가 그 반의 국어도 담당하게 되고 담임도 맡았다.

 나는 창훈이가 참 달리 보였다. 어떻게 그런 어른스러운 생각을 한 것일까. 창훈이는 여의도동에서 날아온 그 홀씨 같은 아이들 중 하나였다. 사는 동네가 달라서는 분명 아니다. 나이보다 점잖고 사려 깊고 학급 친구들과 우애가 깊었던 창훈이가 우리 반 반장이었던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지웅이도 있었다. 귀공자처럼 생기고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던 지웅이. 유리문에 손을 다쳤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애잔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내가 시외버스에서 내리면 우연을 가장하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까지 함께 걷던 작고 귀여운 현이도 있었다. 나중에 커서 자기도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나도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였지만, 아이들에게서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더 많은 얘기들이 숨어 있고, 더 많은 아이들이 기억에 새롭지만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17. 한자 시험     

 학교가 바뀌었다. 첫 학교에서 4년 근무를 마치고, 원거리 내신을 내서 북부교육청 산하로 옮겨 왔다. 남녀공학이었으나 남학생과 여학생을 섞지 않고 따로 반을 나눈 신설학교였다. 갓 입학한 1학년 학생들만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남학교에서 전근을 왔다고 남학생반 담임을 맡기고, 수업도 남학생반만 배정을 받았다. 남녀공학이지만 나는 여전히 남학생들하고만 생활하였다. 

 담임을 맡고 새 학년을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성적이 우수한 학급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아이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는데 내가 할 일은 없을까 궁리하다가 한문 교과목이 성적을 올리기 쉬울 거라는 판단을 했다. 공식이 어렵고 복잡한 수학도 아니고, 문해력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가 쉬운 국어 과목도 아니고, 한자를 많이 외우면 외울수록 유리하니까. 한자를 암기시켜야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학급의 반장과 학습부장이 번갈아 좀 일찍 등교하여 칠판 구석에 한자를 5글자 내지 10글자를 써 놓으면 아이들이 등교하는 대로 그 한자를 열심히 외우면 된다. 나는 종례시간에 잠깐 짬을 내어 그날의 한자 테스트를 하였다. 아이들은 정규 시험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 쪽지시험이지만 칭찬을 듣고 성취감을 얻기 위해 그런대로 열심히 외웠다.      

 우리 반에 정운이가 있었다. 귀여운 얼굴의 총명한 아이였는데 아이들이 이름 대신에 머리가 좀 크다고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통이 크다고 한다. 얼굴이 큰 게 아니라 머리통이 크다고. 내 보기에는 별로 큰 것 같지도 않은데. 아이들은 어떤 때는 참 세밀하고 예리하다. 아무튼 ‘머리통이 크다면 뇌세포가 많을 터이니 사는데 유리하겠지.’ 하고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재미있게 떠오르는 별명이다. 남학생들은 이상하게 별명으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여학생들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참 싫어하고 별명으로 부르지도 않는데 남학생들은 예사롭게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     


 그날도 아이들을 보내고 한자 테스트한 것을 가지고 교무실에 돌아와 채점을 하였다, 정운이가 9개를 다 맞추고 한 글자에서 한 획을 빠뜨렸다. 내가 빨간 펜으로 한 획을 마저 긋고 다 맞은 걸로 해 주었다. ‘이 정도면 다 맞은 거나 마찬가지야 잘 외웠네.’ 하면서. 빨간 펜으로 또렷하게 한 획을 마저 그어 주었으니 정운이도 분명히 그것을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으라고 선생님이 점수에 인심 쓰셨구나.’ 이 정도 생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중에 그 글자가 중간고사 시험에 나왔고, 정운이는 여전히 한 획을 빠뜨려서 틀리고 말았다. 내가 그 쪽지시험 볼 때 틀렸다고 빨간 줄을 좌악 그었다면 아마도 정운이는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 외웠을 것이고 진짜 시험에서 틀리지 않았을 텐데. 아쉬움인지, 미안함인지, 후회인지 뭔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틀린 것은 분명히 틀렸다고 알리고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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