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엄마의 밥상은 항상 정이, 음식이 되어 넘쳐흘렀다.
다섯 형제가 고기 반 찬 하나 없이도 밥 한, 두 그릇씩은 뚝딱 해치웠고, 오빠의 그 숱한 친구들과 동네 아줌마들이 모두 엄마의 밥상에 앉아 종종 밥을 먹었고, 늘 맛있다 칭찬했다.
길을 가다가도 먹을 수 있는 각종 나물을 캐왔고, 논둑에서는 어린 우렁을 잡았고, 천에 나가서는 민물조개를 잡아와 요리를 했다. 그 별 것 없는 재료들을 항상 된장이며, 고추장에 버무려 요리를 해냈다. 일하는 식당에서 조금씩 싸오는 불고기나 돼지고기 등에 김치나 두부, 각종 채소나 당면을 넣어 10인분의 요리를 만드는 것도 엄마의 특기 중 하나였다.
늘 국과 찌개가 함께 밥상에 올랐고, 늘 국과 찌개를 비워내길 바랐다. 국에 밥을 말아 찌개를 반찬삼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밥이 떨어질 새 없이 채워 넣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건강한 식습관은 배우지 못해도 맛있게 먹는 건 배울 수 있는 게 엄마의 밥상이었다.
엄마의 밥상이 변화한 건 일흔이 되어가면서부터였다. 찌개와 국이 함께 올라오는 밥상이 사라졌다. 엄마가 담은 김치가 맛이 없어졌다. 오래된 쌀로 지은 밥과 이상하게 푸르딩딩한 김치, 너무 커서 국물용으로나 쓸법한 멸치볶음 정도만이 밥상에 올랐다. 젓가락이 닿을 곳이 없었다. 밥 두 그릇은 뚝딱 말아먹게 만들던 김치찌개를 끓이는 일도 드물어졌다.
줄어드는 음식만큼 정도 줄었는지 누구와 같이 밥 먹는 일도 없어졌다. 밥상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같이 밥 먹는 날보다, 동네 아줌마를 밥상에 올려놓고 욕하며 먹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남편 없다고 날 무시한다”는 게 주요 레퍼토리였다. 오빠 친구들도 밥 반찬처럼 오르내렸다. 오빠보다 더 잘 산다는 게 이유였다. 그 보잘 것 없는 밥상을 한 번 차리면서도 먹은 후엔 2시간은 잠을 잤다.
그녀의 밥상이 변할 때, 그녀가 30년은 넘게 하던 춤추는 일을 그만뒀다. 조카를 들춰 업고도 떠났던 기차여행이나 계모임을 통해 가던 여행도 그만뒀다. 형제 모두 반짝이 옷을 입고 콜라텍에 가는 엄마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진 않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엄마는 춤 잘 추는데 우리 형제는 왜 다 몸치냐?!” 웃으며 말했고,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오빠도 “콜라텍 갈 때, 전화해. 태워다 드릴께.” 했다. 엄마에게 숨쉴 구멍이라 여겼던 춤을 그만뒀을 때 우린 무언가 잘못되어가는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아무도 대놓고 묻고 말한 이는 없었다
움직임이 줄고 말도 줄었다. 원래 말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그저 앉아서 티비를 보거나 자거나 두 모습밖에 없었다. 명절 때 온 가족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면 흐뭇하게 웃으며 우리를 보는 게 그나마 밝은 모습이었다.
일흔이 넘어가면서 엄마의 일상은 매일이 같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어딜 돌아다니는지 나갔다가 한참 후에 호박잎 같은 푸성귀를 따오고 아침을 먹고 잠을 잔 후 일어나 교회에서 하는 무료급식소 등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나절이 되면 일하는 식당에 간다. 그게 엄마 일상의 전부였다. 누굴 만나는 일도 없는 것 같았고 연락하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어쩌다 걸려오는 전화는 모두 안 들린다며 끊거나 아예 안 받았다.
그게 내가 아는 그녀의 전부다. 사실, 나는, 우리 형제는, 엄마를 잘 몰랐다. 식당에서 그녀가 어떤지, 그나마 무료 급식소에서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밥을 먹는 건지, 잘 들리지도 않는 그녀가 콜라텍 그 시끄러운 곳에서는 어떻게 상대를 만나 춤을 췄는지 전혀 몰랐다. 글을 전혀 몰랐던 그녀가 어떻게 30년 넘게 혼자서 자식 다섯을 키워냈는지 몰랐다.
그렇게도 몰랐지만,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 인생, 힘들었겠지만 다섯 자식 별 문제없이 키웠으니 엄마도 보람있지 않을까 편한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최근에 글씨를 배운 후로는 엄마가 자주 웃는 것 같아 좋기까지 했다. 글씨를 배워 쓰는 것도, 손주와 짧게라도 같이 있는 시간도 그녀에게 즐거운 일이 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한 달에 두어번밖에 만나지 않았고, 우리 가족은 명절과 엄마 생신 때 외에는 만나는 일이 없었으며, 가족 단톡방에는 누군가 술을 마시고 취기에 올리는 거나한 음식사진 외에는 특별히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몰랐다.
“다 내 탓이겠지만, 다 내 탓도 아니다”라는 그런 문장을 엄마가 쓸 수 있는지 우리는 몰랐다.
노트 하나를 채울 만큼 그녀 속에 쌓인 이야기가 많은지 몰랐다.
그리고 그 노트 한 권만 남겨두고 그녀가 떠날 지 몰랐다.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