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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쪽 할머니네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지 4년 쯤 되었을때, 남편 사촌동생이 할머니집을 방문하면서 말레이시아 친구, 미라(가명)을 집에 데려왔다. 같이 집에서 중국음식인 핫팟을 먹자길래, 미라의 10살된 아들 그리고 우리 내외와 할머니까지 다섯이서 식탁에 둘러앉아 그가 해주는 샤브샤브같은 핫팟을 먹기를 기다렸다. 같이 둘러앉아 있는데 이상하게 우리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말도 많이 오가지 않았고 사촌동생이 그냥 지휘하는 음식에만 집중했다. 빨리 익기를.. 그래서 내 입이 호강하기를.
미라의 아들도 역시 긴장한 모습으로 음식을 먹었는데 나도 왜 내가 이렇게 긴장하는지 이유를 찾느라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였다.
그냥 스치는 생각은 수려한 외모의 사촌동생과 달리미라의 외모가 미치지 못한데 둘이 엄청난 친화력을 자랑하니 살짝 갖지 못한자의 질투가 발생한걸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고, 그둘이 무슨 사이일까를 그 앞에 앉아 상상해 보기도 했으며, 그 열살 아이도 많이 불편하겠다 라는 생각에 내가 어릴적 어른들을 어려워 했던 그 기분을 떠올리며 그 아이의 기분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간단한 대화와 어색함 사이에서 그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먹자마자 미라와 아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촌동생과 나가서 그들만의 장소로 이동해 시간을 보내고 나는 설겆이 하고 남편은 일하고 할머니는 티비에 시선을 돌리셨다. 우린 그렇게 해야할것만 끝내고 뿔뿔히 흩어졌다. 모래알 처럼.
그게 처음 내가 봤던 미라였다.
그리고 중간중간 그 사촌동생이 할머니네 집에 올때마다 그는미라 이야기를 했다. 미라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 생활중이여서 그는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보러 가곤 했다. 그녀의 이름을 들을때마다 그때 어색하게 먹던 핫팟을 떠올렸고, 그 어린 아이의 안부를 묻곤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그녀와 시간을 보내다 할머니를 보러 올때 미라를 데리고 와서 몇일을 할머니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나는 마치 또래 플랫메이트를 만난거 처럼 우리는 찰지게 수다를 떨었다. 삼겹살을 해주고, 낮에는 배고플까봐 김치부침개도 해줬는데 설겆이 하면서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가 남편과 결혼한지 일년좀 넘어서여서 ‘아이’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일단 나는 결혼을 너무 늦게한 상황이였고, 그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격으로 남편의 몸상태가 안좋아져서 일년간을 건강회복에 집중하고자 결심한 상태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아이없는 삶 VS 아이있는 삶’ 이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경험과 나를 위로하는 조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녀의 아들이 벌써 18살이란다. 대학에 갈 나이가 된 청년이 되었다니 우리는 너무 놀랐다. 그때 같이핫팟 먹을때 어린 아이였는데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간다니. 아이는 소도시를 떠나 수도 웰링턴으로 가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미라는 19살에 원하지 않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 사생활 관련해서는 묻지 않고 그냥 그녀가 들려주는 선에서 그녀의 삶을 알아가고 있었다. 미라는 아들과 살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갈등이 깊어져 아이의 아빠쪽 할머니와 생활했었다고 한다. 아들을 잘 보지 못했고 많이 싸웠으며 서로의 골이 깊어져 많이 지친 상태인듯 보였다. 그러면서 노력해보고 갖으면 좋지만 아이를 꼭 같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이가 있지만 그 아이가 나를 싫어하게되면 그런 삶이 힘들다고. 꼭 아이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부모들이 금기시하는 말을 나는 진심어린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너무 상심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는 정도로. 내가 결혼을 너무 늦게 한거 같아 의도치 않은 아이없는 삶을 걱정 할땐 ‘아니야, 괜찮아. 할 수 있어’라는 긍정으로 되받아 쳐줬다. 다른 사람들은 내 말에 동의할지 몰라도, 어떤 선택도 그녀는 내게 한계를 두지 않고 열어두었다. 고마웠다.
그렇게 즐겁게 몇일을 보내고 할머니집을 떠났다. 할머니도 그녀의 스윗함에 매료된듯 또 오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알던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다정했다.
그렇게 길지 않은 몇달이 지나고, 갑자기 태국에서 살고 있던 사촌동생이 급귀국을 했다. 아주 괴로운 비보를 가지고….
미라의 아들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무 충격받았다. 아이에 대해 부정적인 말이 오간 대화를 후회했다. 그런 말이 입에 올려진게 잘못이였을까.. 그가 그 느낌을 바람을 타고 눈치 챘을까..? 엄마와의 텔레파시가 너에게 닿았을까? 우리가 그 대화를 한 날, 그는 아파했을까? 어떤 갈등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학을 가고 지역을 옮기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서 괜찮을거라 믿었는데. 우리 모둔 새로운 출발 앞에선 새 힘을 얻는 법이니까. 너도 그럴줄 알았는데….. 미안해. 그냥 미안해. 너의 엄마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너에 대해 그렇게 말을 하게해서 미안해.
갑자기 너를 만났던 처음 핫팟앞의 식탁에서의 나를 본다. 왜 너를 다정하게 부르지 못했을까? 왜 좋아하는 과목이 뭔지, 좋아하는 게임은 뭔지 묻지 않았을까? 잘하는게 뭔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지 않았을까? 어른이된 나는 너랑 똑같은 정신을 가진채 그 앞에 앉아있었다. 똑같이 불편했던게 후회된다. 다시보면 꼭 “아이구야~ 많이 컸다!!!” 하면서 활짝 웃어주고 싶었는데.
그녀의 가족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에서 돌아와 그녀곁을 지켜주었다. 혼자 있으면 안될거 같아 사촌동생은 또 그녀를 할머니네 집에 데려왔다 이번엔 그녀의 언니와 함께. 삼겹살 파티같은건 없을거라고 못박아놔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많이 노쇠해진 할아버지를 갖고 있는 할머니와 암진단을 받은 내 남편을 위로하려고 이틀내내 저녁상을 차려냈다. 그녀는 오히려 진흙탕에서 일어날 안간힘을 냈다.
나는 뭘 해야할지 몰라 카드를 사서 맛있는 흔하지 않은 초코렛 두개를 끼워 마음을 전했다.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평소 연습해왔던 피아노 곡을 연주해 주었다. 누군가 앞에서 연주한 적은 없지만 내가 마음이 힘들때 위로가 되었던 곡들을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라며 그녀와 그녀의 언니앞에서 연주해주었다. 그 사이 사촌동생은 즉흥 자작곡 막무가내 연주를 해내며 표효에 가까운 가사와 미라의고통 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삼개월만에 사촌동생이 다시 왔다. 그리곤 우리의 바램과 달리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아 현재 케어시설에 있다고 했다. 우리와 있을땐 괜찮을거라며 안심시켰지만 혼자 있게되면 심리적으로 무너져 내릴거란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많이 약해져 있다.
한번은 회사 동료가 비슷한 이유로 아이를 잃었다. 그의 괴로움을 온라인에 표현했었는데,
남편/부인이 죽으면 미망인 이라는 호칭을, 부모가 없는 자녀는 고아라는 호칭을 쓰는데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는 호칭이 없다. 그 이유는 그런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절규하던 그의 메세지가 생각났다.
그녀가 무쇠처럼 힘을 내보길 오늘도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