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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레비엔 Feb 25. 2024

[호스텔 탈라베라] 오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도미토리

지금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6인실 도미토리다. 도미토리는 방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침대 한 칸만 빌리는 것이다. 다양한 외국인 친구를 만들기도 하지만, 어중간한 영어실력에다가 사회성이 부족한 나에게 도미토리는 언제나 편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옷 갈아입는 것쯤은 익숙해졌다. 그래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욕실과 화장실이 부족한 곳이라면 아침저녁으로 눈치게임도 벌어진다.      

도미토리를 주로 임대하는 곳을 호스텔이라고 하는데 저예산의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에도 알 수 없는 규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      


어디나 처음 가는 곳은 두렵지만, 멕시코 숙소는 내가 꺼리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잘 못 고르면, 빈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 빈대는 한번 만나서 물리는 것이 걱정이 아니고, 짐으로 옮겨오고 나면 내가 빈대를 옮기는 매개자가 된다는 것이 문제다. 대부분 유럽 여행자들이 옮겨오는 것을 많이 봤는데, 빈대는 어떤 기피제도 소용없이 자리를 잘 잡는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그 특징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는데, 빈대는 고열로 스팀소독을 하지 않으면 약제로는 퇴치가 어렵다.      

빈대를 핑계로 나는 잘 가지 않던, 도미토리 중에서도 가격이 비싼 편인 호스텔을 골랐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체인 호스텔은 저렴한 싱글룸보다 비쌀 때가 많지만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깨끗한 시트에 빈대가 없는 안전하고 쾌적한 곳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호스텔의 규칙

호스텔의 규칙은 여행자들의 허점을 공격한다. 쾌적하기 위해서 고른 숙소는 사람이 많아서 다시 불쾌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한 가장 저렴한 숙소는 하룻밤의 고요를 선물하기도 한다. 

 체인 호스텔은 언제나 붐비고, 언제나 즐겁고, 언제나 바쁜 단기 여행자들의 것이다. 역시 도착했을 때는 침대하나 비어있지 않았고, 조명에 콘센트 사물함까지 잘 갖춰진 침대는 커튼으로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한국사람들과도 잘 못 어울리는 나는 눈 맞출 기회도 찾기 어려웠다. 며칠 안에 도시를 둘러보고 떠날 여행자들도 딱히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쾌적하고 적당히 소외되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밤 혼자라면, 해야만 하는 일

 만약 붐비는 도미토리가 불편해서 조용하게 보내고 싶다면, 그 동네에서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호스텔을 찾아야 한다. 희한하게도 싱글룸을 빌리는 비용이 아까워 도착한 가장 저렴한 호스텔은 인기가 없어서 혼자 밤을 보내는 좋은 기회가 오는 경우가 많다.  


호스텔 탈라베라에서의  첫날밤

나도 호스텔 탈라바라로 떠나면서 작심한 것이 있다. 만약 오늘밤 내가 혼자자게 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저렴한 숙소를 선택할 때는 언제나 두렵다. 안 뜨거운 물과 불편한 화장실, 더러운 숙소, 불친절. 호스텔 탈라바라에 도착하자마자 안도할 수 있었다. 가격이 의심스러울 만큼 잘 정돈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적당한 호스텔에서 2주를 기다렸다가, 한 달 동안 지낼 숙소로 이동해야 했는데, 오자마자 이곳이면 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그날밤 도미토리에는 나뿐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 낮동안은 열어두었던 도미토리 문을 닫으면서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언제까지 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을 하기로 했다. 고작 여행 열흘 만에 길어 난 손톱과 발톱을 자르기로 했다. 이곳 침대에는 사생활 보호용 커튼이 없지만, 오늘밤 이 6인실에는 나뿐이라서 괜찮았다. 커튼이 쳐진 도미토리에서 물론 손톱을 깎을 수도 있었지만, 부스럭 대는 소리로 커튼 안의 서로를 확인하는 체인 호텔에 울려 퍼지는 똑똑 손톱 깎는 소리는 부끄러웠다.  

그러나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마치지 못한 일도 있었다. 소리가 나는 전동 제모기를 사용하는 나는 그날 꼭 제모도 했어야 했다. 가방 안에 가득히 오프숄더 셔츠와 짧은 스커트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날은 제모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날 밤은 어김없이 다른 여행자가 들어왔다. 제모는 물 건너갔다. 저녁쯤 들어온 서양인 여행자는 안타깝게도 불편한 동양인이 있는 것을 보고는 안녕 한마디를 남기고 가져온 타월로 스스로 침대에 커튼을 치고는 잠들었다. 여행자에게는 그날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다. 어젯밤에 해야 할 일을 해치워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인사를 건네는 이유

이미 소개했듯이 이곳에는 현지인과 이곳에서 몇 가지 일을 해주고 머무는 장기 여행자가 있었다. 그들은 나가지도 않고 컴퓨터만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이미 깨달았다. 그리고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우리가 앞으로 함께 해야 할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가장 저가의 숙소에는 좋든 싫든 함께 시간을 공유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무리 어색해하더라도 우리가 서로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서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다. 돈을 아껴서 원하는 만큼 오래 새로운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무도 없는 날, 손톱깎이 같은 해야 할 일은 해치우고, 공용 주방에서 어색하지만 끼니를 해결하고, 사소한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이방인들로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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