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더

조용히 나를 만든 날들

by 가슴속호수

‘조금만 더'라는 속삭임이 마음속 깊은 호수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한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소리가 이제는 나의 온 존재를 뒤흔든다. 그 작은 메아리가 묵직했던 삶의 발걸음을 어느새 가볍게 만든다.

세월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흘러간다. 청춘이란 이름의 배는 어느새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추억만이 물안개가 되어 남았다. 지나간 날이 아쉬움의 빛깔로 물들 때, 그리움은 바람결에 실려와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인다. 다시 내 안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청소년 시절, 서로 다른 꿈의 갈림길 앞에 섰다. 선생님은 교육자의 길을, 어머니는 가톨릭 사제의 소명을 원하셨다. 나는 선친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그때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자신을 맡겼던 걸까. 만약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호수의 잔물결이 되어 마음에 아련한 흔적을 남긴다.

그 시절의 삶은 고요한 호수였다. 별다른 파동 없이 흘러갔다. 성인이 되어서도 안정과 평온이란 이름의 환상을 좇았다. 시간은 흐르고 직장 생활의 반복 속에 갇힌 채, 자기 계발이란 단어는 메아리 없이 사라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이 안개가 되어 마음을 서서히 잠식해 갔다.

중년의 문턱에서 아내와 함께 도시의 소음을 뒤로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어깨 위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연의 품에서 새로운 숨결을 찾고자 했다. 병환으로 지친 아내와 작은 마을에서 텃밭을 가꾸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렸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의 제국 록펠러』라는 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의 삶은 내 심연을 흔들어 놓았다. 달빛이 잔잔한 호수를 비추듯, 그의 이야기가 내 생의 어둠을 밝혀주던 순간이었다. 왜 평범함의 안락한 테두리에 안주했을까? 왜 더 멀리, 더 높이 도전하지 않았을까? 책장을 넘기며 아쉬움과 마주하게 되었다. 끝없이 자신을 밀어붙인 그의 결단력이 내 내면의 깊은 곳을 깨웠다.

19세기 말, 석유왕 록펠러에게 기자가 물었다. “지금도 엄청난 부자인데,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였다. 이 간결한 응답은 인간의 끝없는 열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멈추지 않고 전진하려는 의지, 가능성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갈망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순간, 내 안에서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열정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통해 그가 철저한 십일조 헌납의 모범인지, 냉혹한 독점 자본가의 표상인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마음을 뒤흔든 것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먼 지평을 바라보았던 그의 시선이었다. 조금만 더 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의지를 그에게서 발견한 순간, 그 화두는 오래된 우물에서 퍼 올린 맑은 물이 되어 내 목마름을 적셨다.

돌아보니,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애잔한 후회가 밀려온다. 뚜렷한 방향 없이 고장 난 나침반을 따라 걸어왔음을 깨달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숨을 내쉬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단조롭고 조급함 없이 흘러가는 삶의 풍경이었다. 익숙함이라는 안전한 테두리 안에 머물며 도전을 피했던 자신을 마주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건 아니었을까.

학창 시절, 친구들은 꿈을 위해 책을 읽고 밤을 새워 토론했다.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끊임없이 세상에 도전하며 새로운 경험의 파도에 뛰어들었다. 반면 나는 과제와 시험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취업이란 안전한 목표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걸었던 길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만약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더 넓은 세상으로 뛰어들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빛깔로 물들었을까. 그 질문이 고요한 사색의 늪으로 이끈다.

다른 진로를 선택하고 젊은 시절에 『부의 제국 록펠러』를 만났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가능성은 이미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배가 되었다. 지나간 시간의 아쉬움이 봄비가 되어 마음을 적시고,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에 대한 공허한 상상이 가을 낙엽이 되어 내 삶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러한 미완의 감정과 후회 속에서도 새로운 씨앗이 움트기 시작한다. 육체는 한계에 부딪힐지라도, 정신의 날개는 그 너머로 나아간다. 조금만 더 라는 소망이 내 마음 밭에 새 생명을 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육체는 시간의 흐름에 순응할 수밖에 없지만, 정신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도 살아남는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긴 글과 행동을 통해 숨쉬기를 바란다. 삶의 후회 속에서도 희망의 새싹은 자라나고, 탐욕이 아닌 조금만 더 라는 순수한 열망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새벽의 어둠이 물러가고 여명의 빛이 지평선을 물들인다. 조금만 더. 이 작은 속삭임이 남아 길을 밝혀주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불어넣는다. 마침내 고장 난 나침반을 고쳐 참된 방향을 찾았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새로운 책을 펼친다. 지나간 시간은 소중한 지혜의 보고로 남아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과거의 아쉬움은 이제 한 줄기 빛이 되어 오늘을 선명하게 비춘다. 삶은 '한 걸음 더'라는 순수한 열망으로 새롭게 피어난다. 글을 쓰고 지혜를 나누며 세상에 작은 빛이 되겠다는 꿈을 품는다. 이 여정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새로운 지평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며, 더 넓고 깊은 바다로 항해한다. 오늘도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한 걸음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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