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의 역사와 이해 2
“어차피 사람도 아닌데 왜 좋아하는 거야?” 순수한 머글의 잔혹한 질문은 오타쿠를 당황하게 한다. 어떤 버추얼 아이돌은 외형만 캐릭터일 뿐 인간적인 매력을 뽐내며 사랑받고 있다. 버추얼이라는 요소가 오히려 팬과 소통을 하는데 재미와 감성을 더한다. 버추얼이라서, 완벽한 외모의 캐릭터라서 좋다는 사람들도 많다. 머글이 모르는 세계에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캐릭터를 좋아하는 오타쿠들도 꽤 있다. 비슷한 감성을 가진 팬들은 인간적인 매력이 덜 해도 캐릭터적인 매력을 느끼며 버추얼 아이돌을 좋아한다. 그만큼 저마다의 이유로 버추얼 아이돌의 팬이 된다. 이를 자세히 탐구하기 위해 '가상 연예인'의 역사를 먼저 훑었고, 이제 버추얼 아이돌의 부류를 ‘버추얼 유튜버형’과 ‘버추얼 인플루언서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PLAVE, 이세계아이돌, 싸이코드, APOKI, RE:REVOLUTION, 스텔라이브 등
버추얼 유튜버형 아이돌과 버추얼 인플루언서형 아이돌의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뒤에 사람(본체)이 있냐 없냐이다. 물론 버추얼 아이돌 자체가 여러 기술, 자본, 노동으로 이뤄진 결과물이기에 사람은 언제나 있다. 중요한 것은 버추얼 유튜버형 아이돌이 캐릭터의 정체성 구축을 거의 한 사람에게 일임한다는 점이다. 상황에 따라 라이브 방송만 진행하고, 노래와 댄스는 다른 사람이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팬이나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주체는 대체로 한 명이다. 지난 글에서 소개됐던 버추얼 유튜버의 시초 키즈나 아이는 성우가 4명이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불매 운동이 생겼을 정도로 팬들은 버추얼 유튜버를 담당하는 사람이 분화되거나 교체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버추얼 유튜버형 아이돌은 인간적인 매력을 바탕으로 팬들과 유대감을 형성한다. 개개인이 모두 독보적인 서사를 쌓아나가며 팬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위 그룹 중 유일하게 멤버별 개인 채널이 없는 플레이브도 그룹 공식 유튜브를 통해 매주 라이브 방송을 진행한다. 국내에서 버추얼 아이돌 문화를 양지로 올린 플레이브는 유튜버보다는 아이돌, 가수 내지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본체가 라이브 방송, 노래, 댄스 등 전부 소화하는 것을 넘어 고퀄리티의 음원과 안무까지 직접 만드는, 케이팝 씬에서 각광받는 자체제작 아이돌이다.
버추얼 유튜버형 아이돌의 정체성이 사람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본체의 존재를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조금 배웠다고 본체 이야기를 쉽게 꺼내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버추얼 팬들 사이에서 본체 언급은 ‘빨간약’으로 불릴 정도로 금기시된다. 버추얼 자체에 집중하는 대다수 팬들의 몰입감을 깨트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연예인들의 부캐를 지켜주듯 버추얼도 존중해 주자.
플레이브의 소속사 블래스트 이성구 대표는 본체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 "디지털 펭수라는 생각이다"라며 "펭수라는 캐릭터를 소비할 때 그 뒤에 어떤 분이 있는지 알고 있는 분들이 있지만, 그 본체에 대한 IP를 소비하지 않는 것처럼 블래스트도 마찬가지다"라고 답했다. [원문 링크]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다가 성우까지 덕질하는 사람들도 있듯, 팬들조차 정체를 궁금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작사에서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자. 프라이버시권 침해이자 일종의 영업 방해다. 실제로 일본 유명 버추얼 유튜버 그룹 니지산지의 개발사는 신상 유포자를 고소해 처벌하기도 했다.
K/DA, Heartsteel, 나이비스, 메이브, 신디에잇 등
버추얼 인플루언서형 아이돌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캐릭터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K/DA와 Heartsteel의 경우, 발매 음원을 부른 가수, 인터뷰를 진행하는 성우, 안무를 소화한 댄서, 전부 다르다. 나이비스의 목소리는 여러 명의 성우 보이스를 섞어 만든 것이며, 신디에잇의 목소리는 AI로 구현한다. 메이브는 올해 1월 데뷔 1주년에 맞춰 멤버 시우의 AI 챗봇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버추얼 유튜버형 아이돌이 트렌드인 듯하다. 메이브도 지난달부터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으며 AI가 아닌 사람이 방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버추얼 인플루언서형이 더 많은 기술과 자본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일회성을 넘어 팬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먼 훗날에도 버추얼 유튜버형 아이돌이 대세일까?
AI 때문이더라도 트렌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소름 돋게도 AI는 이제 인간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던 공감과 위로도 할 줄 안다. 대형 AI 챗봇 사이트 character.ai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캐릭터는 상담을 해주는 ‘심리학자’다. 2025년을 배경으로 했던 영화 <HER>이 현실이 됐다는 것을 체감시키는 틱톡 영상도 있다. 이 틱톡커와 챗봇의 로맨스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AI 전문가조차 너무 빨리 바뀐다고 말할 정도의 발전 속도이니, 버추얼 유튜버형 아이돌 못지않게 유대감을 형성하는 AI 버추얼 아이돌이 나올지도 모른다.
특히 케이팝 명가 SM에서 제작한 나이비스가 앞으로 어떤 정체성을 구축해 나갈지도 기대된다. 버추얼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처럼 기존의 버추얼 아이돌과는 또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을까. 오늘은 문명특급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당신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버추얼 아이돌의 감성을 이해하는 팬들이 똘똘 뭉치며 커뮤니티와 비즈니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 초 현대백화점에서 진행한 버추얼 아이돌 팝업스토어 매출이 70억 원을 기록했을 정도로 팬덤의 화력이 어마무시하다. 개인화된 미디어 환경에서 옛날만큼 ‘대세’가 존재하지 않는 요즘, 앞으로는 더더욱 제작자와 아티스트, 팬들이 서로 얼마나 밀도 있는 감정을 공유하고 이어 나가냐에 따라, 음악 시장에서의 성패가 갈릴 것이다. 팬들과 특별한 서사를 쌓아나가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이 유리한 이유다.
음악 생산자의 미션은 유명해지는 것, 히트곡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수라도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면서 그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된다. '의미 있는 관계'란 팬 참여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으로 인디펜던트의 방식이었다. 앞으로는 메인스트림의 아티스트들도 인디펜던트의 방식을 참고하거나 차용할 가능성도 높다. '관계'는 더 중요한 자산이자 전략이 된다. [원문 링크]
<버추얼의 역사와 이해> 시리즈를 통해 버추얼 아이돌과 좀 더 가까워졌길 바란다. 이제는 PLAVE부터 시작해 버추얼 아이돌이 ‘관계’라는 자산을 어떻게 구축해 나갔는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할 예정이다. 현업 종사자뿐 아니라 팬들의 목소리까지 직접 담아내 버추얼 아이돌의 매력을 확실하게 영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