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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범양 Apr 19. 2019

#. 여자로 사회생활을 버텨낸다는 것

- 어쩌면 너무 편파적일 수 있는 이야기


 여성은 참정권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지위 있는 일을 하기 시작한 지 고작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여자지만 대학 입학 때까지 단 한 번의 남녀차별을 겪지 않고 자라왔다.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회장 또는 반장은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는 관념 자체가 우리에겐 없었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충분한 급우의 지지만 받으면 남녀 불문하고 그렇게 지위를 쟁취했다.


 체력적인 차이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것은 다름이었지 틀림이 아니었다. 단순히 남녀란, 체육시간에 체육복을 따로 분리해서 갈아입어야히는 다름이었고, 수학적으로 남자가 좀 더, 여자는 문학 사회적으로 좀 더 재능이 있는 편이라는 다름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 집안 분위기 역시, 딸 셋인 딸 부잣집이어서 그런지 부모님은 모두에게 공평했고 모두 그저 각자의 재능에 따라 꿈을 가졌다. 성별적인 열등감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고, 우리는 각자의 꿈을 어떤 제한도 없이 꿨다.


 하지만, 나의 미래엔 나와 가장 가까운 ‘어머니’와 같은 삶은 논외였다. 나는 엄마와 같은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엄마란, 엄마가 그저 평범한 주부의 삶을 택했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노동은 귀하다고 생각했고, 엄마의 노동은 하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당연히 나의 꿈은 주부와 거리가 멀었고, 나의 인생계획에는 ‘아이를 가진 후의 삶’은 없었다. 그곳은 그저 공백이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

 대학 입학 이후까지도 내 삶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대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남자를 그저 성별이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고, 그저 같은 경쟁 선상을 달리는 동일한 경쟁자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첫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생각은 점차 달라졌다.


 나의 첫 직장은 연구소였다. 연구소는 박사님 뿐만 아니라 석사 졸업생의 연구직 종사자(계약직, 위촉직 등)와 연구를 보조하는 연구 보조직, 행정직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너무나 당연히 남녀 성비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여성은 주로, 보조직과 행정직에 편향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연구보조원으로 내 업무에 충실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는 나를 ‘어린 여자애’로 대했고, 동료가 아닌 ‘여자’로 생각하며 나를 재단하였다. 그리고 어리기에 내가 가졌던 맑은 기운을 ‘웃음이 헤픈 여자’로 정의해버렸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이가, 나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처음 직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 그 눈물의 기억은 아주 자연스럽게 잊혔고 나는 평소와 같이 열심히 일했고, 또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평범하게 복학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또 다른 인턴을 했고, 원하는 방향으로 스펙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스펙을 채워나가는 기간과 평행한 기간에,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람과 평생을 같이하고 싶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찾아 일하고 싶은 열정 또한 공존하였다.


 그래서 일단 사랑을 뒤로하고, 일을 찾아 직업을 갖기 위해 보통의 취업준비생과 같이 자기소개서를 쓰고 인적성 시험을 본 결과로 은행에 입사했다.


 은행, 성비는 3:1이었다. 물론 은행 연수에서 성별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영업점에 배치되고 나선 점차 상관이 생겼다.


 영업점에 어린 여자가 들어와서 분위기가 밝아졌다는 아무개, 멘토니까 매일 같이 점심도 저녁도 먹어야 한다는 아무개. 여자니까 너는 빼고 다른 사람은 조인트를 까며 욕하니 그건 너를 위한 배려라는

것을 알라는 아무개. 여자니까 넌 생수통을 채울 필요 없다는 아무개.


 배려라는 차별을 받고, 같은 일을 하는 이가 아님을 그 배려로 선을 그었다.


 같은 영업점에서 일하는 여자 대리는, 아이로 인하여 일은 못하는 여자로 낙인 되고 싶지 않아 누구보다 먼저 영업점 문을 열었고, 가장 마지막까지 일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개는 ‘여자여서 배려받고 있어, 육아휴직도 꽉 채워서 쉬고 복귀했다’라고 했다.


 가정이 있는 데 일을 하는 여자는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미 회사에서 배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회사에서 잔뼈를 키운 여자는 어느 누구보다 더 억센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고,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자를 그렇게 만드는 회사를 벗어나 가정을 가지고도 가정을 돌보며 나의 커리어 역시 포기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곳을 찾고자 했다.

그렇게 공기업을 갔고, 대기업을 입사했다.


 하지만 그 아무개는 어디에나 있었고, 그 경중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며, 일하는 가정이 있는 여자가 된 후 나는 가정을 지키려면 대기업에 다녀선 안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 무게를 짊어지고 눈치를 보며 사회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직장을 내려놓고, 아이가 생겼다.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직장을 갖고자 퇴사를 했고, 공부를 시작하고자 하였으나, 입덧으로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떤 것도 먹지 못하는 상태로 3개월을 지냈다. 그러자 배가 점차 불러왔고, 또 아래가 빠질 것 같은 통증으로 수액을 맞으러 병원을 왕래했다.


 공부는커녕, 평범한 일반인의 체력 발 끝에도 못 미치는 힘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지켜내고 출산을 했고, 아이가 있는 , 공백기가 있는 경력단절녀가 되었다.



 한창 입덧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룹 입사 동기에게 연락이 와 근황을 나눴다.

 나는 나의 상황을 말했고, 그는 나에게 ‘와 이제

너는 그냥 이젠 남편 돈 받아쓰는 김치녀네?’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지금 나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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