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쿠팡에서 신규 사원이란 쿠팡에서 난생처음 일하게 된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쿠팡의 신규란, 말 그대로 쿠팡에 처음 간 사람들과 3개월 동안 쿠팡 물류센터에 발길을 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를 포함한다.
만약 쿠팡 알바를 1년간 했지만 3개월 동안 일하러 가지 않았다가 다시 갔다면,
1년의 경력에도 신규로 분류되는 것이다.
신규는 교육으로 약 2시간을 앉아서 보낼 수 있고 교육시간은 모두 근무시간으로 인정되는데, 쿠팡의 신규 교육에 교육을 위한 강사가 따로 동원되는 것은 아니었다.
HR이라고 하는 인사팀 혹은 채용팀이라고 할 수 있는 부서에서 신규 교육과 채용을 맡는 걸로 보였고,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기 전에 책상 위에 놓여있던 건강상태 확인서를 작성하라는 미션을 받았다.
건강상태 확인서는 이름에서 예측할 수 있듯 내가 가진 지병이나 현재의 건강상태를 쿠팡에 알리는 용도인 것 같았다.
예전에 진단받았거나 치료 중인 질병, 만성질환이나 뇌질환 혹은 정신질환이나 호흡기계 질환 등을 앓고 있다면 적어 넣어야 했고 최근 5년 이내 수술이나 시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그것도 고지사항이었다.
아무것도 표시할 부분이 없다면 해당 없음에 표시하면 되는 거였는데 나는 그동안 운이 아주 좋았던 덕분으로 해당 없음에 체크를 한 후 고개를 들었다가 내 앞에서 두 자리 건너쯤에 앉은 50대 여성이 확인서에 채운 서너 줄을 언뜻 보게 되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뜨끔했고 다 작성한 확인서가 뒤에 앉은 사람으로부터 앞으로 차곡차곡 모이기 시작할 때는 다른 이의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몸을 쓰는 일을 하면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을 텐데 하는 걱정이 닥쳐왔고 주위에 앉은 약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이나 해당 없음에 체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또 반대로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교육생들이 작성한 건강상태 확인서가 하나로 모이자, 신규 교육은 영상교육의 방식으로 곧 시작됐다.
교육 영상은 성희롱 및 성차별 교육 관련 내용이 처음으로 재생됐고, 이후에 이어진 영상도 그다지 새롭거나 어렵다고 느끼기 어려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애써 집중해서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는 사람들도 1/3 가량은 됐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렇게 피곤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쿠팡은 새로운 물류센터에 갈 때마다 신규로 분류되어 교육을 다시 받아야만 한다.
오늘 여기서 신규 교육을 받았더라도 내일 다른 센터로 처음 간다면 거기서 또 똑같은 영상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교육 영상을 여러 번 보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 안 그래도 별로 재미는 없는 영상을 또 보고 있자면 잠이 오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는 걸 납득하게 됐던 거다.
1시간 정도 이어진 교육 영상 시청 후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남겨야 했는데, 이름과 원바코드(전화번호)에 생년월일에 사인을 해야 하는 문서가 시험지처럼 교육생들 사이를 돌았다.
사인을 하면서 보게 된 교육생들의 나이는 20대에서 50대로 다양했는데 왜 그때 60이 가까운 나이에 쿠팡에 오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마지못해 쿠팡에 와서 일하려고 한 것이 아닌, 단지 무료한 시간을 보내거나 아직도 새로운 경험에 목이 마른 부류의 사람들일 수도 있었는데.
우리 모두는 타인이었다.
가능한 한 떨어져 앉은 우리들은 인연이라기보다는 우연으로 엮였고, 쿠팡이 아니었다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모여 앉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불편해하는 상황에도 그 불편함을 자신의 불안 때문에 무시해 버리는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어떻게든 누군가를 조잡한 인연의 끈으로 묶어 의지되는 친구처럼 하루를 같이 보낼 존재를 찾는 사람들.
50이 넘어 보이던 남자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청년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청년의 마지못한 단답이 뭉개진 발음으로 튀어나오는 소리는 분명 탐탁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남자는 모른 척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일방적인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그 남자는 두려웠던 것일 테다.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짧아진 시점에 섰어도,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의 공간에서 일어나고 겪어내야 할 일들이 주는 두려움은 더 줄어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테니.
지루하게 재생되었던 교육 영상의 끝에는 보는 이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영어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How did I ever live without Coupang’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정도로 해석이 되는 이 문장은 쿠팡의 비전이다.
어떤 기업이든 쿠팡이 가진 것 같은 비전이 없는 곳이 있을까 싶지만 쿠팡의 비전은 특히 의미심장했다.
찜찜한 여운을 남긴 영상 교육 이후에는 보안팀 담당자가 작업장 안으로 갖고 들어갈 수 있는 물건과 아닌 물건들을 안내해 줬다.
이미 쿠팡 알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듯 휴대폰이나 전자기기는 반입할 수 없고 개인 소지품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는데, 뭘 갖고 들어갈 수 없느냐가 아닌 소지 가능한 게 있느냐를 꼽는 게 훨씬 쉬웠다.
립밤이나 핸드크림조차 소지가 불가능하고 작은 간식거리라고 해도 혹시 도난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반입할 수 없다고 보면 됐다.
실질적이고 알찬 교육이라기보다는 교육을 했다와 받았다. 를 증명하기 위한 게 더 커 보이는 약 2시간이 안 되는 교육이 끝나자 이제 나와 동기들은 현장으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작업장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