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선택의 이유, 왜 나는 이런 사람들만 만날까?

by 이응이응이응




배우자 자리의 십성이 결혼 생활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A의 배우자 자리에는 ‘식신’이 있고 식신은 여자에게는 자식을 뜻한다.


식신이 배우자 자리에 있으면 배우자를 자식처럼 대하고 가정에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다.


A의 결혼생활은 모두 돌봄과 보살핌의 방식으로 진행이 됐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무능한 남성이야말로 A의 방식에 아주 잘 맞는 남자라고 할 수도 있다.


결혼 생활을 왜 유지했는가가 아니라 왜 헤어졌는지가 더 의아해질 수도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식신, 즉 모성애라는 감정의 이면이다.


식신은 남편을 돌보는 식으로 헌신하면서도 비판하고 통제하게 되는 기운이다.


흥미롭게도 식신은 맹목적인 애정은 아니라고 한다.


서열을 정하는 권위라고까지는 못해도 사랑할 땐 사랑하고, 버릇을 들일 땐 엄격한 부모에 가깝다고 할까?


남편을 사랑해서 챙기면서도 남편의 무능을 가르치고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식신이라는 십성 자체가 어떤 현상의 문제점을 정확히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식신의 영향이 큰 사주는 특정 분야에 꽂히면 최상을 추구하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자기 재능과 좋아하는 일을 살려서 일하는 직업이 특히 잘 맞다고 하니 사실, 웬만한 것에는 만족하기 힘든 쪽이라고 볼 수도 있다.


A도 그랬다.


좋아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했고, 그래야 만족할 수 있었다.


A가 자신이 돌보아야 했던 배우자들을 고른 이유는 그저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헤어짐의 이유는 똑같았다.


A는 끝내 그들을 고칠 수가 없었다.


정관에 대한 강한 영향력으로 남편과 남편이 만들어줄 수 있는 울타리는 A에게 있어서 중요한 삶의 목표가 되었고, 식신이 더해져서 돌봄 성향이 두드러지자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남자들을 만났다.


하지만 묘하게도 헛된 관계를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식신이었다.


사주에는 ‘식극관’이라는 말이 있다.


‘식상(식신과 상관)이 관성을 극한다.‘ 로 풀어지는 이 말은 A의 사례와 아주 잘 들어맞는다.


또한 이 식극관은 왜 A가 금융기관이라는 거대 조직에 들어갔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했는지도 설명할 수 있게 한다.


관성(정관)은 배우자에 대한 A의 의지를 강화시켰고 직업 선택보다는 삶의 태도에 좀 더 영향을 미쳤다.


사주마다 인생에 특히 영향을 미치는 십성이 있다고 하면, A의 인생을 멀리서 볼 때 가장 큰 존재감으로 작동한 건 관성보다는 식신이었다.


정관이 A의 사주에서 가장 큰 존재감의 십성이었다면 A는 아마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혼했다 해도 다시 결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관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 이혼이나 재혼도 망설이게 만들 수 있으니까.


A가 잘못된 결혼을 더 일찍 끝낼 수 없었던 건 확실히 정관의 영향이었지만, 결국 끊어낸 건 식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A는 말년을 맞지 않았다.


정관의 힘이 초년부터 말년까지를 지배하는 사주라 앞으로 더 결혼할 수도, 또 이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의 결혼 경험으로 읽어낼 수 있는 건, A는 돌봄이 필요한 남자를 고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돌봄이 필요한 남자가 너무 애틋하고 그 관계를 끊어내는 게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면 바람직하지는 않다 해도 관계는 지속이 가능하다.


하지만 A에게는 그렇지 않다.


보살핌이 필요한 남자에게 끌렸지만, 그 애정에는 아주 또렷한 한계점이 있었다.


사주에서 읽어내야 하는 건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나는 왜 자꾸만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가?


내 욕구를 채워주고 관계가 지속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A에게는 A의 보살핌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그 가치를 폄하하지 않고, 가정 밖에서는 제 몫을 충실히 하는 남자가 잘 맞는다.


사주를 공부하면서 나는 사람의 미래를 단적으로 결론 내는 ‘예언’이라는 방식이 흔하다는 것에 의문을 갖게 됐다.


A의 사주는 결혼이나 직장에 따르는 운이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무난하면서 조화가 잘 된 사주라, 사주만 보면 여타의 사람들보다 좀 더 안정된 인생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다.


A의 사주만 보고 결혼이 힘들다거나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크다고 읽어낼 역술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예언’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정해진 데로 향할 거라는 숙명의 무력함을 떠올리게 한다.


사주팔자가 숙명이라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왜 선택을 하고, 왜 자신을 더 잘 알고자 할까?


모든 사람의 사주에는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은 희망이지만 그게 곧 결과가 되지는 않는다.


사주의 가능성은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게 곧 보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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