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팔지꼰의 숙명, 나는 나쁜 배우자를 만날 운명일까?

by 이응이응이응




남녀는 상극이다.


적어도 사주에서는 분명 그렇다.


남자에게 여자를 의미하는 십성은 재성이고 여자에게 남자를 뜻하는 십성은 관성인데,

여자에게 남자(관성)는 여자를 극하는 십성이다.


사주에서 극한다는 것은 통제하고 압박한다는 것인데 남자가 없으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시절에는 딱 들어맞는 구조다.


현대에서 남자가 여자를 통제하고 압박한다는 구조는 이미 퇴색됐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남녀가 상극인 것만큼은 다름없다고 하겠다.


재밌는 건 사주에서 남녀의 연연, 부부를 보는 시각이 꽤나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사주는 기본적으로 숙명을 깔고 운명을 해석하는 철학이라 인연이라는 틀을 숙명론적으로 칠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는 꼭 만나야만 했던 인연에 대한 흔한 환상을 품고 있다.


유난히 끌리고, 우연한 만남이 반복되고, 교제와 결혼까지 이어지는 길이 순탄하다면 그것이 그야말로 반드시 만나야만 했던 인연이 아닐까 하는 믿음 같은 것.


하지만 사주는 꼭 만나야만 하는 특정 인연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드러낸다.


인연이란 합과 서로의 기운이 잘 맞아서 엮일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끊어질 수 있고, 끊어낼 수도 있으며 그 인연과 끝났다고 해서 다른 인연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의외로 새롭다.


사주는 인연은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시기와 패턴이 기본이 된다고 본다.


그 시기와 패턴에 어떤 유형의 사람이 들어와서 어떤 성격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 인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랑 지상주의자들에게는 지극히 T의 주장처럼 보이겠지만 사주에서 바라보는 결혼의 성격도 비슷하다.


반드시 만나야만 할 한 명의 인연이 있으니 짚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일이라고 해도 반드시 엮여야만 한다는 게 아니다.


사랑 하나로 모든 게 극복 가능하다는 건 사주에서는 뜬구름 잡기나 마찬가지다.


사주는 감정의 조화(식신과 상관)로 만남을 시작하고 결혼은 현실적인 십성인 재성과 관성으로 완성해야만 질 높은 배우자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숙명과 운명을 재료로 하지만 사주는 인생을 다루기에 감정에만 얽매이는 것을 몹시 경계한다.


남녀의 인연이야 감정이 얽혀서 시작할 수 있지만 관계는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서로의 현실적인 상황, 관계에서 위험이 될지도 모를 본성, 경제적인 문제 등을 감정에 취해서 외면하는 것을 ‘지팔지꼰’으로 보는 것이다.


남녀가 상극인 이유는 너무나 다른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다름이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가 변화와 성장을 돕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고 보듬는 관계가 있다면 더없이 이상적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관계를 맺기는 너무나 힘들다.


상생이란 결국 상극을 단계를 거쳐서 자리 잡기 마련이고 갈등과 화해, 애착의 사이클은 단단한 유대감을 만든다.


사주에 나의 숙명이 담겼다고 하니 배우자 역시 또렷하게 정해져 있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앞서 배우자의 기운을 읽는 법을 설명한 대로 사주에서 배우자는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사주에서 배우자 인연을 다루는 게 꼭 인생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기기 때문만은 아니다.


배우자 인연이 사주에 있어도 그 인연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인연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배우자의 존재가 내 인생에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배우자 인연이 중요한 것은 그게 나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될지도 모를 사람이면서 내 인생의 주요 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인생의 과제를 치러내면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한다.

그저 나쁜 인연을 만났다고, 내 팔자는 왜 이럴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닌 그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배웠느냐를 사주는 주목한다.


만약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비슷하게 작용하는 관계를 겪으면서 과제와 시험을 치러야 했을 거라는 건 그야말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통찰이기도 하다.


사주에서 인연을 비롯한 숙명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 영혼이 배움과 시험을 거쳐서 성장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비롯한 여러 인연만큼 나를 가혹하게 시험하고 성장시키는 존재는 세상에 없다.


사주에서 배우자와 그 관계의 양상을 읽어낸다는 건 사실, 내가 경험해야 할 현실을 파악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사주에서는 나쁜 인연을 필수적이라고 여길까?


나를 진 빠지게 만드는 호된 인연이 큰 공부가 될 거라고 주장할까?


사주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바로, ‘나’다.


나는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다.


나쁜 인연과 엮일 수는 있어도 그 관계를 감내하고 참아야 할 이유는 없다.


모든 시험이 배움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나쁜 인연을 통과해서 결국 그걸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결말을 맺을 수는 없다.


나는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굳이 나를 흠집 내고 짓밟는 인연의 지옥을 향해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너무 소모적인 가학이 아닐까?


사주는 숙명이지만 온전히 나의 우주다.


이 우주에 나쁜 인연이 끼어들 수는 있어도 그걸 감내하든가 내치든가 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고 권리다.


사주에서 내가 배우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 배우자가 내게 크나큰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이는 반대로 내가 어떤 관계에서 취약할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내 약점을 알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다른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사주는 닫힌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기회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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