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은 나를 극한다.
십성과 나는 ‘나’가 극하고 생하고 식으로 관계를 관계를 맺는데 관성과의 관계는 다른 십성과 꽤나 다르다.
재성은 내가 극하고, 인성은 나를 생하고, 식상은 내가 생하는 십성이다.
내가 극하고 생하니 압박감이 덜 느껴지는 경향이 있는데, 관성은 그 반대로 작용한다.
‘나를 제어하고 다듬는 힘’을 관성이라고 정의하는데, 나를 생하는 인성과 비교하면 확실히 엄격한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관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명체에게는 세상에 적응하고 성장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시련이 필요하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적어도 인간을 춤추게 만드는 데 있어서 칭찬의 힘은 오래가지 못한다.
나를 생하는 인성은 이를테면 나를 춤추게 만드는 칭찬이지만, 사주에서 인성이 너무 강할 경우 게을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뭘 해도 잘한다, 앞으로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칭찬만 받으면 어떻게 될까?
자기는 칭찬을 받으면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칭찬만 받으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된다.
사실 성장하고 싶지도, 무언가 성취하고 싶지도 않다면 압박이나 규율이 소용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를 제어하는 힘은 곧 ’사회화‘로 이어진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족과 함께 사는 데도 ’사회화‘는 필요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는 일, 다른 이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나의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 자각하는 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 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걸 아는 게 사회화다.
십성 중에 인성은 자신감을 충전시켜 주고, 식상은 나를 표현하는 기운을 더해주니 인성과 식상이 있으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인성과 식상이 모두 지나치면 소위 ’지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평가받기 쉬워진다.
자신감은 지나치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으니 남의 얘기는 듣지도 않고 묵살하면서 내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외향적이고 사회성이 좋다고 평가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돋보인다고 믿고 그걸 좋아하는 쪽에 가깝다.
사실은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는 내향인들보다도 더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사주를 바탕으로 추측해 보자면 인성과 식상은 넘치는데 그걸 잡아줄 기운이 확실히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식상과 인성이 1개씩 있지만 힘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고 재성과 관성이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주를 가졌다.
그래서 내 사주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에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조직에 잘 적응한다고 해석이 된다.
실제로 재성과 관성이 강하다는 건 강한 현실감각으로 작용한다.
‘편관’ 성향 때문에 기준이 엄격하면서도 그 기준을 다른 이에게 적용해서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도는 자제하게 되는 것이다.
내 관성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좋지만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쪽으로 많이 쓰인다.
현실감각이 있으니 유연성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게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이다.
관성이 작용하는 건 내 사주의 기준이 되는 일간이 어떤 오행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내 경우 일간이 을목이라 관성이 ‘금’이 되는데, 만약 일간이 ‘토’라서 관성이 ‘목’이라면 작용 방식과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는 구조다.
목은 기본적으로 자라나고 뻗는 성향이 강하다고 본다.
성장의 기운은 좋지만 제멋대로 자랄 수 있으니 문제가 되는데 관성이 ‘목’에게는 정리와 규율이 된다.
특히 갑목과 을목, 어떤 나무냐에 따라서 관성의 영향이 달라지는데 아름드리나무와 덩굴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갑목은 성장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무작정 높고 크게 자라나는 기세에 관성이 현실감각이 더해진 규율이 된다.
똑같은 나무지만 을목의 경우는 강한 기세를 멈춰 세우는 게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나가려는 덩굴줄기를 정리하는 가위나 칼이 되어서 적응력을 키우게 만든다고 한다.
눈치 없이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끼어들 수도 있는 을목의 성향에 규칙을 세워준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압박과 통제는 분명히 상처가 된다.
목 일간의 경우 대놓고 가지가 잘려나가는 데 그게 마냥 정리나 정돈으로 느껴질 리가 없다.
특히 나처럼 ‘신약’ 해서 나약한 을목의 경우는 관성이 좀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다른 오행의 경우는 어떨까?
관성은 나를 극하니 모든 오행이 관성에게 압박과 통제를 받는 구조이지만 그 흐름과 양상도 비슷할까?
모두, ‘을목’처럼 관성이 나를 과하게 억누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