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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미의 colorful life Sep 27. 2022

내돈내산 비즈니스석 이용기

생존에서 안락함으로

세계여행은 마일리지 발권이 제 맛이지




세계여행은 오랜 꿈이었다. 대학생일 때 서른에는 세계여행을 가리라 결심했다. 왜 서른이라 물으신다면, 그 나이 정도가 되면 막연히 세계여행을 할 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되리라 짐작했었다.  


세계여행 가이드북을 마르고 닳도록 보며 머릿속에 경로를 그렸다. 장기 플랜이었기에 서른까지는 5개 국어를 해야지 하는 결심으로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장기 플랜이 그러하듯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했다.



그러다 마일리지를 쌓아 세계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대한항공의 세계일주 보너스 항공권은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등 전 세계 19개 스카이팀 항공사가 운영하는 구간을 통해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는 상품이다. 주요 원칙은 아래와 같다.


한 방향으로만 여행해야 함

스카이팀에 소속된 항공사에서만 예약

가족 마일리지도 사용 가능


이 사실을 안게 된 후로 마일리지를 모을 수 있는 신용카드를 썼고, 현금을 제휴 포인트로 변환하여 마일리지로 모으는 '삼포 적금'도 수차례 해왔다.


어느덧 약속했던 서른이 다가왔다. 막상 마주한 서른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기 세계여행에 뛰어들기에는 이룬 것이 없는 어린 나이였다. 쌓은 마일리지도 세계여행 항공권을 발권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유야무야 서른 중반으로 접어들고 목표 마일리지를 달성했다. 세계여행 마일리지 발권은 2023년 4월에 종료된다고 한다. 이제는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다. 결심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생계를 팽개치고 퇴직 후 세계여행을 갈 수는 없다. 휴직이라면 육아휴직 정도 가까스로 허용되는 K-회사에서 여행을 목적으로 한 휴직을 허락할리 만무하다. 여러 여행기의 주인공처럼 퇴직 후 세계여행을 지르지는 못했다. 방향을 선회했다. 편도 비즈니스 항공권이다. 왕복은 안되고 런던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편도 항공권을 비즈니스석으로 끊었다. 생애 첫 비즈니스석이다.  얏호  








세계여행에서 비즈니스석으로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여러 통계에 따르면 그 답은 No이다. 하지만 돈으로 불행을 피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제주도로 가는 이코노미석을 타기 시작 한 순간부터 이코노미석에서 주로 피곤했다.


남미에 갈 때에는 20시간 이상을 닭장 같은 외항사 좌석에 앉아 몇 시간에 한번 주는 모이를 기다려야 했고, 러시아에서 돌아올 때는 물 한번 청했다가 러시아 승무원의 퉁명스러움과 맞서야 했다.


창가석에 앉을 때면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마다 복도석에 앉은 승객에게 양해를 구해야 함은 당연하다. 장거리 여행에서 앉아서 자는 것을 어려웠기에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여독에 시달렸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설렘이 불편함을 상쇄했지만, 동시에 덜 피곤하고 덜 불행한 비행을 꿈꿨다.




닭장에서 방으로, 생존에서 안락함으로




처음 타본 비즈니스석에서는 모든 것이 쉬웠다. 22년 9월 현재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은 파업으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어 항공권 체크인을 하려면 하세월이다. 그런데 비즈니스석은 전용 프런트로 빠르게 발권할 수 있었다.


전용 프런트에서 발권하는 나를 보고 먼저 줄을 서서 기다린 청년들은 '저래서 마일리지를 모아서 비즈니스 항공권이 끊어야 하는 거야.'라고 이야기를 나눴다.


현금으로 비즈니스 항공권을 산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나 보다. 그들의 짐작이 물론 맞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담당 승무원이라며 미소가 아름다운 분이 자리에 와서 인사를 한다. 이어서 사무장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잘 부탁드린다고 한다. 비행기는 남부럽지 않게 탔지만 이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그런 경험.


식사는 그릇에 코스로 진행됐고 다양했다. 배가 부를 만큼 많이 제공됐다. 식사 후 시간에는 간식이 무한으로 제공되었고 난 옆 외국인의 주문을 그대로 따라 하며 부지런히 제공되는 서비스를 쫓아갔다.


물은 보틀로 2병씩 목이 마르기 전에 주었고, 제공된 파우치에는 칫솔 치약, 핸드크림 바디크림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슬리퍼는 이코노미석의 그것보다 훨씬 두꺼운 양질의 진짜 슬리퍼였다. 가방은 앞자리 의자의 아래에 넣을 필요 없이 넣는 칸이 따로 있었다.


180도까지 제쳐지는 의자를 내리고 잠에 들었다. 장거리 비행기에서 4시간 이상을 내리 잔 것은 처음이었다. 10시간 남짓의 비행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이 모든 과정이 처음이었으므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수동식 창문이 아닌 자동으로 창문의 조도를 조정하는 것은 해 본 적이 없어 승무원에게 여러 차례 사용법을 물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나처럼 초짜가 아닌 매번 비즈니스석만 탄 듯 익숙한 모습의 사람들이 있었다.








비즈니스석의 변기 뚜껑은 올라가 있어




그들은 주로 머리가 반쯤은 새고 수행원이 따로 있는 비즈니스 콤비를 입은 나이 든 남자였다. 비행기에서는 문서를 검토했고 종이신문을 보다 익숙한 듯 잠이 들었다.

비즈니스석의 변기 뚜껑은 주로 올라가 있었다. 화장실에는 그들을 위한 면도기가 구비되어 있고 구두끈을 맬 수 있는 곳이 따로 마련되었다. 평균적으로 50~60대의 남자가 회사 경비로 비즈니스석을 타고 있었다.

공식적인 명칭은 프레스티지석이지만 주로 비즈니스석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보통 사업 목적으로 프레스티지석을 타기 마련이여서겠지.

자본주의에서 돈은 누구 주머니로 흘러가는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시점이었다.  







공식 질문 : 행복한 여행 되셨나요?




라디오스타처럼 대한항공에서는 승무원의 마지막 공식 질문이 이어졌다.


"행복한 여행 되셨나요?"


나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너무 즐거웠어요."

 

보통의 여행은 현지에서 마무리되었으나 이번 여행은 비즈니스석 경험이 마지막 여정이 되었다. 

숙면을 취해서인지 여독도 훨씬 덜했다. 물론 세계여행의 꿈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있다. 언젠가는 세계 여행하는 그날까지 밥벌이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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