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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할아버지와 노배터리

아이 셋과 함께한 치앙마이-빠이 여행기

by 오로시

치앙마이의 첫 번째 숙소는 올드타운 안에 있었다. 올드타운은 치앙마이 중심에 있는 구시가지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모양을 따라 성벽을 만들고 그 바깥에 도랑을 파서 물을 채운 해자로 도시를 보호했다. 현재는 성벽 일부분만 남아 있지만, 과거 적의 침입을 막았을 해자는 여전히 남아 있어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올드타운의 고즈넉한 느낌은 좋지만, 역사적으로 보호하는 구역이기 때문에 큰 마트나 화려한 건물은 없는 지역이다. 말대로 올드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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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피곤함에 지쳐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태국까지 왔으니 망고는 먹고 싶은데... 피곤에 지친 아이 셋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대형마트나 야시장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차라리 안 먹고 말지. 그렇게 마음을 접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호텔 건너편에 망고, 바나나 등의 과일을 파는 리어카 노점이 보였다.


‘저기 가면 먹을 수 있겠다!’ 아이들을 어르고 얼러 간판대로 갔다. 주인이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거리는데 노점 뒤쪽에 노숙자로 보이는 분이 쓱 일어나서 우리에게 걸어오는 것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앞치마를 하고 계셨다. 아...이분이 주인 맞구나.. 며칠은 못 씻은 듯한 몰골, 손때와 기름이 찌든 캡모자까지. 순간 갈등이 일었다. 망고는 먹고 싶고, 할아버지를 보니 위생이 걱정이고...


나는 튼튼한 장과 한국에서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가져온 매실환을 믿고 망고를 썰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망고 5개를 골라 할아버지께 드렸다. 할아버지는 아주 여러 번 사용한 것 같은 투명 비닐봉지를 꺼내 봉지로 망고를 잡고 한쪽으로 큰 칼을 꺼내 망고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망고를 잘랐다. 우리는 그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집중력이 낮은 아이들도 할아버지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망고의 껍질이 너무 얇아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작년 베트남 푸꾸옥에서 망고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망고 속 과육은 잘라서 아이들 주고, 나와 남편은 껍질에 붙어있는 과육과 망고씨에 붙은 과육을 감자탕 고기 뜯어 먹듯 먹었던 기억들... 할아버지가 자른 망고 껍질은 아주 얇았고, 씨에도 붙은 과육은 거의 없었다. 할아버지는 망고 깎기의 달인이었다. 할아버지는 하루에 몇 개의 망고를 깎으실까... 얼마 동안 망고를 잘라 오신 걸까.


할아버지는 자른 망고를 투명 플라스틱 통에 담으셨는데 꽤 커 보였던 플라스틱 통이 한 개의 망고를 넣자 다 채워졌다. 아...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스틱 통 5개를 사용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여행하면서 발생하는 쓰레기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할아버지가 망고 한 개를 통에 넣고 다시 다른 망고를 깎으려고 할 때 내가 손짓으로 말했다.


-우리 여기서 먹고 갈게요!

우선 검지로 나를 가리키고 다음에는 망고를 가리키고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내 입으로 먹는 흉내를 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웃으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와 남편, 아이들 셋은 그 자리에서 망고가 든 플라스틱을 들고 이쑤시개 하나로 순서를 정해 망고를 먹기 시작했다. 다른 말도 없이 감탄사만 나왔다. 말캉하고 쫀득했다. 열대열매의 특징답게, 뜨거운 햇살 아래 자란 과육은 달콤하게 익어 입안 가득 퍼졌다.


우리가 망고 하나를 다 먹으면 타이밍 좋게 다른 망고가 나왔다. 타이밍이 좋았던 건지 할아버지가 우리가 먹는 속도에 맞춰 주신 건지는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서두르는 법 없이 묵묵히 망고를 자르고 계셨고 우리는 그 앞에 서서 망고를 먹었다. 그렇게 망고 5개를 다 먹고 엄지를 내보이고 숙소에 들어갔다.


그다음 날에도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숙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저녁도 거른 채 늦은 시각이 되어, 숙소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막내가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다 하고 계산을 마칠 때까지 막내는 밥도 못 먹고 잠만 잤다. 이제 나가야 해서 막내를 깨우니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수현아, 망고 할아버지한테 가자.


우선 막내를 구슬르기 위해 꺼낸 말이었는데 막내는 그 말을 듣자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기적 같은 발걸음이었다. 속으로 ‘망고 할아버지가 없으면 어쩌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을 생각하며 걷는데 할아버지의 노점상이 있던 자리에 작은 불빛이 보였다.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안도감으로 변했다. 아...다행이다. 됐다! 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하고 우린 망고 5개를 골랐다. 할아버지는 서 있기도 힘들어하는 막내를 보자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를 건넸고 막내는 그 의자에 앉아 할아버지를 맥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걸은 데다 저녁 식사도 거르고 잠에서 깬 4살 아이는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모습이다. 내가 아는 태국어는 '안녕하세요(남자는 싸와디캅, 여자는 싸와디카라고 말한다.). 감사합니다(남자는 코쿤 갑, 여자는 코쿤 카 라고 말한다)‘ 정도밖에 없었고, 할아버지도 영어에 능숙한 분이 아니셨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막내를 보더니 한 말씀 하셨다.


- 노 배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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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할아버지가 찾은 정확한 단어로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막내는 방전이 되어 꺼져버린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노 배터리에게 망고를 자르기 전에 바나나를 쥐여주셨다. 동생만 혜택을 받는 걸 순순히 지켜볼 수 없는 형, 누나들도 순간 눈에서 뭔가 번쩍하는 것이 보였는데 뭐라 항의하기 전에 그들의 손에도 바나나가 쥐어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노 배터리에게 조금씩 충전을 해주셨고 우리는 어제와 같이 망고를 받아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배탈이 난 사람도 없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여행 중 누군가 힘들어하면 그 사람을 향해 ‘노 배터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면 망고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말캉말캉 달콤했던 망고의 맛과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과 '노 배터리' 단어 하나로 마음이 통했던 순간들을.

여행이 끝나고 나면 사람이 남는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 순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눴던 시간들. 함께 있었던 공간의 온기. 그런 추억들이 모여 여행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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