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by 일경

누가 되었든 이런 상황엔 나와 같은 판단을 했었으리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자식들을 그냥 볼 수 없었다. 나는 나의 도리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속상했다. 나보다 아내가 더욱 속이 상했을 것이다. 참으로 미안했다. 내가 사고를 내어 고척동 형무소에 들어갔을 때, 어찌 소식을 들었는지 면회를 왔는데 그때 처음으로 아내의 눈물을 보았다. 연애 때 그리 생글대던 얼굴에 눈물이라니. 옷매무새도 단정하지 못하고, 머리도 잔뜩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심지어 젖 물리는 둘째는 떼고 올 수 없는 탓에 어떻게든 업고 온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나는 정말 큰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형무소에서 나오게 되고 집에는 돌아왔지만, 다시 버스를 몰 수는 없었다. 한번 사고를 내고 나니, 회사는 내게 더는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다른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도 어떻게 소문이 퍼져, 낙인이 찍힌 듯 제명수준의 처우를 받아버렸다. 그렇게 삼 개월이 지나니 그나마 모아둔 돈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아내의 한 마디로 알게 되었다. 여보, 이젠 쌀이 떨어졌어요. 사실 나는 돈이 바닥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이는 여태까지 아내가 돈에 관해서 내게 아무 불만도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반찬의 가짓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때부터 보일러를 틀지 않아 바닥에 냉기가 서릴 때까지 그저 취직되지 않는다며 한탄하고 허송세월하였다. 아내의 말을 듣고 문득 정신을 차린 후 삼 개월을 돌이키며 더는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몰래 속앓이를 하고 있었을 아내가 어떤 상황을 겪어 왔었을지 생생히 그려지는 듯했다. 더욱 미안한 감정은 파도처럼 몰려와 나를 덮쳤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내 뭐라든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신 차리고, 뭐라도 해야겠구나. 해야만 한다. 멍하니 있기에는 내가 책임질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는 형님과 소주 한잔하며 내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중동 쪽으로 가서 일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중동이라, 학교 다닐 때 스치듯 배우고, 뉴스에서 한두 번 정도 본 것이 전부였던 곳. 내 인생과 털끝만큼도 연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지역이었다. 내가 중동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기름이 많이 나고 무진장 덥다는 사실 뿐이었다. 형님은 사촌 동생도 지금 사우디에 가 있는데, 외화벌이를 통해 애국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밥도 맛있고 숙소도 좋고 결정적으론 그렇게 돈벌이가 좋다면서 연신 침을 튀기기며 이야기를 해댔다. 나는 다른 이야기는 그리 들리지 않았고, 보수 이야기만 관심이 갔다. 형님은, 네가 받는 월급이 얼마였지? 아 그렇구나, 그 돈의 5배에서 7배 정도 받는다. 고 말했다. 5배에서 7배라니. 그렇게 몇 개월만 있으면 급한 불을 끄는 것은 물론, 더 좋은 곳으로 이사까지 갈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결정을 내리는 데 그리 큰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가겠습니다, 갈게요. 어떻게 가면 되나요?


그렇게 형님이 소개해 준 건설사에 면접을 보고, 약 5개월 대기했다. 그동안엔 그 전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막일을 열심히 했다. 어차피 가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고 조금이나마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9월의 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김포공항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배웅했다. 부모님껜 비밀로 하고 떠났다. 최소한의 사람에게 걱정을 끼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내의 두 손을 꽉 잡으며, 조금만 참으면 고생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말했다. 아내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보잉 747 점보기는 2층으로 되어있는 정말 커다란 비행기였다. 나는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그 엄청난 크기에 압도당했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내가 몰던 꼬마 버스를 생각했다.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 미워져 그만두게 된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비행기를 몰 줄도 모르면서 괜히 가슴 한 켠이 시큰해졌다.그렇게 비행기에 올라타, 비행이 시작되었다. 태국 방콕 공항을 경유하는 항로였는데, 예상치 못한 기상 악화로 인해 대기하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사우디 다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게이트 쪽에 회사 관계자를 만나고 곧바로 셔틀버스를 올라타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왔다. 문이 열리자, 나는 이곳이 폭열의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턱 막히는 숨통, 강렬한 햇살, 고난의 직감은 더욱 선명해져갔다.


다음 날 6시, ‘새마을 노래’소리에 기상. 식당으로 달려가 빠르게 한술을 뜨고, 셔틀버스를 타 현장으로 출근했다. 나는 다란 공항의 활주로 확장 및 격납고 공사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 활주로 아스팔트를 포장하는 날이면, 정말 일 분이 일 년 같았다. 위, 아래로 뜨거운 열기가 나를 바싹 조여왔다. 얼음물을 먹어도 돌이키면 목이 탔다. 그렇게 12시까지 일을 하고 나면, 오후에는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밥을 먹고 오침을 했다. 그나마 그냥 덥기만 하는 날엔 땀이 바싹 말라 까끌까끌한 소금기가 온몸에 가득한 느낌이지만 일은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습기가 가득한 날이 더욱 문제였는데, 작업복이 수분기를 머금으면 손발을 끈으로 묶은 듯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날엔 일을 할 수 없다. 그렇게 정말 악명 높은 곳임을 알면서도 버텨야 했던 이유는 내 시급이 정말 한국의 5배 정도 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단 하루라도 버티는 것이,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이 진정으로 간절했다. 고향엔 내가 보내게 될 돈을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몸무게는 약 10㎏ 좀 넘게 빠진 듯했다. 몸이 이곳저곳 아프고, 관절에서 나는 뼛소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크게, 자주 났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오침을 하던 때, 관리소장이 쉼터에 들어와 인부들에게 혹시 버스를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기존에 통근 버스를 운전하던 사람이 병이 나 당분간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아차, 했다. 한국에서의 사고 경력 때문에 어차피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소장과 간단한 면접, 그러니까 경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나니 쉽게 통과시켰다. 정신없이 면접을 마치고, 다음날 바로 셔틀 운행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더 큰 문제는 운전석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앉는 운전석이었다. 둔탁한 재질의 운전대를 잡자 나는 사고가 났던 그 날의 순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순간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정신 차리자. 나는 운전석을 조절하고, 사이드미러를 확인 후 안전띠를 매고 기어 중립을 확인했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꾹 밟은 뒤 시동을 걸었다. 굉음과 함께 버스의 시동이 걸렸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사고가 나던 그 순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의 작은 실수로 벌어졌던 사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간 사고. 나를 폐인으로 만들고, 내 아내와 아이들을 배곯게 했던 사고. 나는 기어를 바꾸고, 클러치를 떼며 액셀을 서서히 밟기 시작했다. 진동을 내며 버스가 움직였다. 나는 인부들을 태우고 조심스럽게 운행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나온 인부들은 버스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곳의 동트는 순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밤하늘 별은 총총히 박혀있고 저 멀리서 동이 트면 별과 달, 해가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환상이었다. 나 역시 공사 현장 일을 할 때는 잠을 자느라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사고에 관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광경 덕분에 안정을 얻었다. 아니, 안정 이상으로 출처 모를 어느 위로를 받았다. 이곳에 와 몸을 혹사하며 이와 같은 따뜻한 마음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면서, 아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당신과 함께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어찌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해지자, 눈앞이 뿌옇게 되었다. 나는 천천히 버스를 멈췄다. 차 안엔 코 고는 소리와 작게 진동하는 엔진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나는 조용히 흐느꼈다. 짧은 시간의 흐느낌이었다. 늦지 않게 현장에 도착하기 위해선, 다시 출발해야 했다. 그 순간 이후 나는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가장이라는 책임감을 넘어선 삶의 희망이었다. 꼭 사랑하는 당신과 다시 행복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희망. 당신과 행복한 집에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따뜻하게 잠을 잘 것이라는 희망. 언젠가 이곳만큼 아름다운 곳에서 당신과 오붓하게 내가 느낀 이 감정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 그렇게 나를 앗아갔던 버스는 지구 반대편 어느 사막 위에서 나를 다시 살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수개월이 지나고, 계약 기간의 만료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내가 한국을 떠난 지 딱 1년이 되던 때였다. 아내에게 돌아가게 될 날짜를 적은 편지를 발송했던 날 기분이 참 묘했다. 그래도 한국을 떠나던 때처럼 그리 불안하진 않았다.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없는 짐을 싸고, 돌아가기 전 간단하게 신체검사를 받았다. 이곳의 음식이 아무리 품질이 좋다고 하지만, 영 맞지 않았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환경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해서인지 몸무게는 한국에서와 비교했을 때 15kg가 빠져있었다. 인부 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몸은 너무나도 쇠약해져 있었다. 그래도 전염병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탓에 어렵지 않게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구나. 한국은 지금쯤 가을이 왔겠지, 적응하지 못하고 감기에 걸리면 어쩌지. 걱정의 생각이 가득했지만, 사실 매우 설레하고 있었다. 드디어 아내와 아이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도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목도리를 둘렀다. 온도 적응을 하지 못하는 탓에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친한 동료의 조언 때문이었다. 역시 한국은 꽤 추웠다.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니, 너무나 낯설었다. 나는 게이트를 찾아 나왔다. 많은 사람이 게이트 앞에서 입국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연신 아내와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내가 떠나기 전보다 뽀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보니 참으로 수척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빠르게 나를 스쳤다.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맞이한 아내. 있는 힘껏 아내를 안았다.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음식도 잠자리도 좋다고 했잖아요. 왜 이렇게 말랐어요. 왜 이렇게 말랐어요. 아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집 현관문을 열고 나니 온풍이 가득했다. 따뜻한 음식 냄새가 났다. 어머니와 아버지, 첫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갓난아이였던 둘째는 어느새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나는 눈물을 흘렸던 새벽 버스 안을 생각했다. 그때는 지금 같은 상황을 간절히 기원했는데, 지금은 그때를 회고하는구나. 참으로 맛있던 집밥과 사람의 따뜻함. 행복은 멀리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가까이 있었다. 그것은 먼 타국에서 알게 된 가장 가까운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