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웠던 사람과 작별을 고하고 난 직후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될 때쯤 정신과를 찾은 어느 날이었다.
앞서 오랜 사회생활의 삶을 돌이켜보자면 나는 오만하게도 인간관계만큼은 신경 쓰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었던 거 같다.
대략 어느 정도냐면,
인간관계란 살다 보면 약간의 상처 정도를 주고받는 것쯤은 양방 간 무언 하에 허용되는 것이며
거기서 남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여겼던 오만하고도 부끄러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어찌 보면 회피형 인간이기도 하다.
인연을 끊을 때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무엇을 잘못했고 서운했었는지
아무 말없이 연락을 단절시켰고
내 싸늘한 태도에 대한 이유를 말해 준 적이 없다.
그렇게 나는 매몰차게 사람들을 떠나보냈고
반대로 누군가들이 먼저 연락을 끊더라도
그 이유를 물어본 적도궁금한 적도 없었다.
그 여름, 나는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마음으로 상담실로들어섰고 앉자마자 선생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Q. 선생님! 제가 오늘은 한 번도 얘기드린 적 없는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해요.
그전에부탁이 있는데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제 정신과 상담기록에 남기지 않으셨으면 해요.
왜냐면 제가 정신과를 다니게 된 이유와
지금부터 얘기드릴 사람과는 상관없는 거니까요.
(참고로 상담 초반나는 정신과 상담기록이 신경 쓰였다.
마음속에서 형체 없이 떠돌아다니던 그 조각난 고통들을 끄집어내고 그것이 따닥따닥 키보드 자판에서 타이핑되는 즉시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되는 것 같아서 싫기도 했고 그 날은 상담실에 앉은 순간에도 그 사람이 소중했기에 나의 좋지 않은 상담기록에 그 사람의 존재를 남긴다는 것조차 미안스러웠다)
그래도 한편으론내가 죽게 된다면 그 명백한 이유에 대해상담기록이미리 준비해놓는 유서를 대신할 수 있을 거 같아서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이 조용히 키보드 자판에서 두 손을 내려놓으시고는 포개어 책상 위에 올려두셨다.
Q.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사람은 남자예요. 제가 이성 얘기는 처음하죠?!
제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얘기해 본 적 없는 시람.
일로 인해 알고 지낸 지는 꽤나 되었는데 저는 그저께 그 남자에게 처음으로 그동안 제가 느꼈던 속마음을 얘기했어요.
이러이러한 이유(선생님께 여러 가지 있었던 상황을 말씀드렸다)로 너는 내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거 같다.라고요.
그렇게 우리는 인연을 끊었어요.
A. 잘했어요.
그리고 다신 그 사람하고는 연락하지 말아요.
남을 이용하고 피를 빨아먹은 사람 같으니라고.
이런 게 말로만 듣던 기를 빨아먹는 멘탈 뱀파이어란 건가...
나는 유난히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 중 그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고 그 사람이 나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조건 없는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건 없는 배려.
그것이 내가 지향해 온 그 사람과의 관계다.
그간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놓쳐버린 치명적인 나의 실수. 그것은 나는 나 스스로보다 무조건 그 사람이 우선이었다. 이처럼 조건 없는 배려라는 잘못된 관념은 좋지 않은 결과가 되어버렸다.
조건 없는 사랑이란, 상대가 아무리 멋대로 굴고 다 받아줘야 한다고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를 이용하거나 학대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과 관계를 끊을 정도로 자신을 사랑할 필요가 있다. <책/아니타 무르자니 지음/나로 살아가는 기쁨 중에서>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
나는 그 사람에게 차마 자존심이 상해서 존중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 네가 나한테 저지른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표현을 했다.
그렇게 나는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내 인생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는 것을 관계를 끝내고서 너무나 뒤늦게 깨우치고 있었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대를 떨쳐 낼 용기는 필요하다. 상대가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헤어짐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책/양지아림 지음/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버리기로 했다 중에서>
A. 인간관계란 거래나 다름없어요.
사랑하는 남녀 사이가 헤어졌다고 칩시다. 그것도 하나의 거래가 끝난 겁니다.
'실연'이 아니라 거래 종료.
나에게 물질적이든 감정적이든 이익될 것이 없다면, 끊어지는 것.
그것이 인간관계예요.
자신을 먼저 지키세요.
(정신과 기록에 그 사람 얘기는 쓰지 말라고 부탁을 할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건 끝을 맺는 방법이에요. 마무리가 중요해요.
안녕을 고할 때는 그 이유를 차분하게 분명히 밝혀야 해요. 그리고 그 사람을 마음속에서 용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