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얼어있던 땅이 채 녹기도 전,
메세지 하나가 도착했다.
동네 형님내외가 포도농장을 하는데, 이제 너무 연로하셔 농장안에 포도 나무를 좀 줄이고 싶어 한다고.
혹시 포도나무 심을 생각 있냐고 묻는 메세지였다.
한그루에 오천원인데, 우리가 직접 가서 뽑아와야 한다고 했다.
신혼초에 살았던 집 근처에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주택을 개조해서 카페로 만들어서 작은 마당이 딸려있고, 그 한켠에 포도나무가 있었다. 꽤 오래된 나무라 그런지 가을만되면 포도가 정말 주렁주렁 열렸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엔 항상 포도를 따먹으면서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우리는 간혹 가을이 되면 그 카페 얘기를 하곤 했다.
거기에 포도가 열렸겠다. 라고
그래서 메세지를 받으면서 약간 설레었다.
우리집 마당에 포도나무가 있으면 가을이 더욱 즐겁고 풍성할 것 같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무를 사겠다고 얘기하고,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같이 차타고 이동하자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제법 큰 도구와 차량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아랫집의 용달차까지 동원되어 우리는 포도나무 쇼핑을 갔다.
광활한 포도밭에서 마음에 드는 나무를 고른 다음, 뿌리가 다치지 않게 뽑으면 된다고 얘기해 주셨다.
욕심내지 않고, 작은 나무로 골라서 뽑느다고 뽑았는데
꽁꽁언 땅을 삽으로 조심조심 뿌리가 다치지않게 나무를 뽑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작아보이는 나무인데, 뿌리는 정말 어마무시하게 깊었다.
"어느정도 잔뿌리는 다 그냥 자르고 큰 뿌리만 안다치게 살살 파야해"
라는 농장주인의 말에 따라 한다고는 하지만, 포도나무 뿌리는 땅속 깊은곳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거의 시중이나 드는 정도였지만, 농사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남편에겐 너무 생소하고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삽질앞에서 이상한 자존심이 발동하는건지, 도움을 청하지 않고 옆사람들이 하는걸 보고 제법 잘 뽑아냈다.
포도나무 사러 가자길래,
오천원주고 모종을 사오는건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착각이었다.
애지중지 조심스럽게 뽑아온 포도나무를 심기위해 또 다시 마당에서 언땅을 삽으로 깊게 파낸 후, 그 구덩이 안에 물을 한가득 채운 후 포도나무 뿌리가 다치지 않게 넣은 후, 조심스럽게 흙을 채웠다.
처음엔 한그루만 뽑을까? 하다가 욕심내서 두그루를 뽑아왔더니 심는것도 두배나 힘들었다.
겨우겨우 포도나무를 옮겨놓으니, 한나절이 저물었다.
다음날부터는 또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포도나무의 줄기에 있는 껍질을 모두 칼로 벗겨냈다.
가끔 티비나 사진으로 만나는 큰 포도농장의 포도나무들의 줄기가 참 깨끗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기전에 모두 칼로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는 거였다.
껍질이 있으면 그 사이사이에서 해충이 자라기 쉬워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줄기가 매끈할수록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냥 기다리면 된다.
새싹이 나고 꽃망울이 올라오고 포도가 열리는 그 시간들을 그냥 기다리면 된다.
"비료도 농약도 물도 별도로 줄 필요가 없이 그냥 놔두면 알아서 크는거야" 라는 어르신의 말씀에 따라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면 정말 포도가 열릴까?
농약이라도 쳐야 하는거 아닐까? 비료로라도 줘야 하는거 아닐까? 고민했는데
정말 시간이 지나니 포도가 열렸다.
"첫 해엔 그냥 나무를 키운다고 생각해. 포도가 열리면 그냥 다 따버려! 그래야 내년부터 진짜 제대로 된 포도를 먹을 수 있어."
라는 어르신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했지만
막상 포도가 열리니 그 작은 송이송이를 모두 다 떼어 버리는게 너무 아까웠다.
그래도 몇 개 정도 놔둔다고 이 포도가 어떻게 되는건 아닐꺼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포도열매 몇 개는 놔두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거의 끝나갈 시간이되자,
포도가 익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흔히 보는 모두 다 익은 포도송이가 아니라 한알 두알씩 색깔이 바뀌면서 익어가는 포도는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너무 아름다웠다.
그것만 바라보고 있어도 세상의 컬러가 조금은 더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포도는 이렇게 예쁘게 익는구나!
여름이 끝나고 이제 가을의 시간이왔다.
봄에 심었던 채소들은 모두 끝나고, 이제 가을의 작물들을 또 심을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 한켠에 보라빛깔의 포도가 늠름한 모습으로
가을이 왔음을 우리에게 또 다른 형태로 알려준다.
보라빛의 포도에 하얗게 당분이 내려앉아 엷은 막을 생성시키면 그걸 조용히 따서 입속으로 가져간다.
새콤 달콤함을 넘어선 예쁨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았을 뿐인데,
정말 포도가 영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