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은 좀처럼 식재료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얇은 봉지 안에 수분이 꽉 차 있는 듯한 식감, 풀 죽은 사람의 머리처럼 마지못해 달려 있는 콩. 시장을 둘러보다가 콩나물이 있는 곳을 지나가면 다닥다닥 꽂혀있는 콩나물이 징그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이름도 그랬다. 콩나물. 콩이 되지 못해서 나물이 되기를 선택한 비운의 주인공 같은 이름이다.
콩나물을 찾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부터 영양을 챙겨보겠다고 탄수화물, 단백질을 맞춰 식단을 구성하면서 양심껏 채소도 곁들이기 시작했다. 콩나물은 맛의 존재감은 덜한데 아삭아삭 씹는 재미가 있어서 부담 없이 옆에 놓기 좋았다. 가격도 한 봉에 천 원이 안 돼서 일석이조다.
콩나물 무침을 만드는 법도 정말 간단하다. 널찍한 냄비에 콩나물을 가득 담고 물을 100ml가 안 되게 넣는다. 뚜껑을 덮은 채로 센 불에 올려 물이 방울방울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불을 낮추고 약 4분에서 5분간을 찌듯이 끓인다. 불에서 내리기 전 뚜껑을 열어 콩나물을 한 번 뒤집은 뒤 불을 끄고 잔열로 익힌다. 냄비에 콩나물을 그대로, 두고 적당히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얼추 밥 먹을 때가 되면 물기를 꼭 짠 뒤 참기름과 깨소금, 다진 마늘과 간장, 고춧가루 조금을 넣으면 콩나물 무침 완성이다.
콩나물 무침은 냄비랑 젓가락만 있으면 뚝딱 만들 수 있어서 설거지거리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 아삭함이 오래가는 편이라 썩기 직전까지 새것처럼 먹을 수도 있다. 저렴하고 튼실하고, 꽁지에 콩이 달려 있으니 영양가도 풍부할 것이다. 실속 없어 보이지만 꽤 포만감도 든다.
콩나물을 지금까지 멀리하고 살았던 이유는 특유의 비린 맛 때문이었다. 어릴 때 엄마가 콩나물 소고기 비빔밥을 해준 적이 있는데 생소한 비린 맛에 그만 먹다가 토를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소고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콩나물이 문제였다. 콩나물을 익힐 때 중간에 뚜껑을 닫거나 열면 비린 맛이 난다. 처음부터 뚜껑을 열거나, 닫고 삶아야만 한단다. 엄마는 언제나 느낌대로 요리를 하는 사람인데 재료를 잘 다루지 못해서 이상한 음식이 나오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분명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잘 쓰지도 않는 콩나물을 사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덮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열었다가 닫았거나, 닫았다가 열었을 것이다.
요즘 따라 집에 자주 놀러 오는 부모님께 웬만하면 밥을 차려드리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맛있게 상을 차리고 나면 이상한 죄책감이 남는다. 자 이것 봐라. 내가 이만큼 자라서 레시피도 뚝딱 찾아보고, 콩나물도 이렇게나 잘 삶고, 부모님 밥 정도는 금방 차려드릴 정도로 장성했다. 라고 자랑하는 기분이다. 그럼 왠지 부모님에게 시간의 흐름을 실감케 하는 기분이 든다. 뚝딱 집안일을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우리 딸이 이제 다 컸구나, 내 역할은 끝났구나’라며 절망할지도 모른다.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걸 들키기에는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철부지일 수도 없는 노릇인데, 참 난감하다.
다시 콩나물의 장점으로 돌아가자면 콩나물은 만들기 쉬운데 가격은 저렴하니 대량으로 삶아서 쟁여두기 좋다. 동거인인 언니가 야금야금 내가 만든 반찬을 꺼내 먹는 걸 볼 때면 어쩐지 한 소리 하고 싶은 옹졸한 기분을 느끼는데, 콩나물처럼 쉽고 저렴하게 많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조금 나눠줘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아껴서 먹어! 라며 밥 먹는 사람 면박 줄 일 없이 양껏 퍼줄 수 있으니 콩나물은 몸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이로운 셈이다.
최근에도 콩나물을 무쳐 놨다. 출근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서 집에서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다 보니 여행은 뒷전이 돼버렸다. 혼자서 겨울 바다를 보는 게 정말 좋았는데 요즘에는 집에서 콩나물 삶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기분이 금방 풀어진다. 슬픔이 이렇게도 얕을 수가 있다니.
나는 기왕이면 콩나물을 뚜껑 닫아 익히는 게 좋다. 왠지 그래야 할 거 같다. 변태처럼 뚜껑을 열 때 한 번에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맞는 것도 좋아한다. 뭉근하게 끓던 냄비의 뚜껑을 열면 그제야 콩나물이 머금고 있던 따끈하고 기분 좋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오! 탄성을 뱉으며,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암시를 건다. 중간에 뚜껑을 닫거나 여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비릿해지는 이 섬세한 콩나물을 내가 자알 삶아냈다는 미미한 뿌듯함을 위로삼아 하루를 견고히 마름질한다.
망한 콩나물과 지금까지의 거리가 제법 길게 느껴진다. 나는 가끔 시간이 과거와 오늘, 내일로 나뉘어 있지 않고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오지 않았고, 지나가지 않았고 언제나 여기에 있다. 콩나물도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니 말이다. 콩나물을 냄비에 넣고 찌면 언제나 따듯하고 뜨끈한 김이 폴폴 올라올 것이다.
문득 오아시스의 <Stand by me>의 가사가 떠오른다. 첫 소절 가사는 이렇다. “Made a meal and threw it up on Sunday I’ve got a lot of things to learn-”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노래를 부르다 후렴구에 도달하면 리암이 외친다. “Stand by me. nobody knows, the way it’s gonna be” 노래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밥을 맛있게 먹다 그냥 토해버리는 사람과 어쨌든 내 곁을 떠나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것들을 몸에 꾹꾹 눌러 담을 때가 있다. 미안해서일 수도 있고, 좋아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다 한차례 쏟아내고 나면 두렵다. 들켰나? 어쩌면 좋지. 그래도 가지는 말아라. 계속 옆에 있어라. 아무튼 잘 익은 콩나물 앞에서 킁킁거리며 일희일비하는 나는 콩나물을 맛있게 만들고 싶은 마음과 그냥 멈추고 싶은 마음에 갈까 말까 혼란스럽다. 갈까-말까 사이에는 미완성된 마음이 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해 비릿한 울렁거림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꺼내는 순간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마음 말이다. 그러니 더 성숙할 때까지, 절로 무르익을 때까지 그저 덮어두기로 한다. 그게 콩나물이든, 마음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