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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ONG Aug 04. 2020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었다.

짧게 남긴 더블린 감상들.txt

Dec. 1st. 2019

망했다.

벌써 바다가 보고 싶고, 엄마는 더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고,

똘이도 보고 싶고, 동양인도 보고 싶고, 한국말 쓰고 싶고,

망했다.


내 짱친 8개월 된 '부츠(Boots)'를 소개합니다! 홈스테이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나한테 엄청 치대면서 배를 보여줬고요? 겁나 미친 귀여움에 치명적인 매력이 있고요? 이 와중에 우리 똘이 보고 싶고요?



Dec. 2nd. 2019

이주 동안 어학원에 갈 때 항상 지나게 될 개구멍이 있다. 검은 빛의 철창을 초록 넝쿨과 수풀이 둘러쌓여있는 그야말로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나올 것만 같은 모습을 한 개구멍이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지름길 겸 조금 더 안전한 길을 알려준다며 알리자(Alicja)와 데린(Darren)은 개구멍부터 알려주었다. 이 시점부터 나는 진짜 여기서 지낸다는 실감이 났다.


중년의 부부는 두 손을 꼭 붙잡고 말 없이 공원을 한참이나 걸었다.

더불어 어스름히 어둠이 내려앉은 스테판 그린 공원은 더욱 평온했다. 



Dec. 3rd. 2019

더블린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청명하고 맑은 하늘을 맞이했다. 첫 수업에서 만난 담당 선생님 아일리시(Ailish)가 '미송! 정말 운이 좋네! 시작이 좋다.'라는 말을 건넸다. 시작이 반이고, 그 시작이 좋으니 왠지 끝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업도 일찍 끝났으니 오늘은 실컷 걸어야겠다.



Dec. 5th. 2019

분명 큰 돈을 주면서 큰 결심을 하고 먼 길을 떠나왔을텐데 왜 수업 시간에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 떠드는걸까. 학생일 때는 어리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핑계가 통하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똑같은 핑계를 말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사회에 물들었고, 이제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 좀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나저나 누가 뭐라하건 끝까지 무시하고 수업을 이어가는 아일리시는 정말 대단한 선생님이다. 갑자기 그녀가 존경스러워졌다.



Dec. 6th. 2019

있는 곳이 달라도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은 다를 바 없는 것이 참 신기하다. 아침에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누군갈 깨우는 한 가족의 엄마의 모습도, 해가 꼭대기에 걸리지 않은 어둑한 시간에도 버스를 타고 각자 가야할 자리로 떠나기 위해 바쁜 사람들의 모습도 어딜가나 한결 같아서 익숙하면서 낯설다.


오늘 학교에 가기 위해 155번 서브에 몸을 싣었다. 목적지로 향할 때 달리는 고속도로도, 창 밖이 보이는 버스 이층 맨 앞 쪽에 자리를 잡는 것도 단 며칠만에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스스로 신기해하는 중이다. 거기다 귓가에는 한국어 노래가 흐르고 한글로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자니 여기가 더블린인지 한국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친구에게는 '대학교 가는 것 같아서 지금 나 되게 설레. 얼마만이야. 가는 시간도, 거리도, 기분도 딱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완전 너무 설레.'라고 적었다. 엄마에게는 '새벽에 갑자기 나타난 동양 여자애가 신기해서 동네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거리기는 하는데 괜찮아. 너무 익숙한 시선이라서. 그리고 다른 곳과 비교하면 아주 빨리 시선이 거둬져 다행히.'라고 적었었지. 단 며칠이지만 조심스럽게 나는 이 곳에 물들고 있었다.



Dec. 8th. 2019

항상 평범했던 일상도 특별해지는 이 순간,


귓가에 흘러나오는 노랫말이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 설렌 것도 잠시, 겨우 익숙해지는 이 일상도 언젠간 끝날 일이라는 것이 확실해서 갑자기 센치해졌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한 다음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를 멍하니 쳐다보고 앉아있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마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지도 않은 끝을 미리 걱정하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지금 내 모습 같아서 한참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평범함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특별함을 찾아내겠지.


이중노출된 이 사진을 보다가 김우성 'Wolf'가 흘러나왔던 순간은 아마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사진과 너무나도 절묘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 곡의 분위기는 주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사진에만 집중하도록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Dec. 9th. 2019

오늘은 호사스럽게 브런치를 먹어보았습니다. 커피도 라떼, 플랫화이트 두 잔이나 들이키고 있고요? 아니 근데 여기는 브런치 맛집인데 커피도 미치게 맛있네요?


비극도 삶의 한 일부분이라서 반드시 겪어야 하고, 이는 희극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다.



Dec. 11th. 2019

오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팔 사탕과 장식을 만들었다. 프로젝트 수업의 일환으로 이렇게 만든 상품은 마켓에서 판매하고 발생한 수익금은 자선단체에 기부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그림 그리고 색칠공부까지 하느라 '백 투더 초등학생'의 기분을 느꼈다. 여기까지와서 꽁냥꽁냥 미술시간을 가질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뜻밖의 재미였다.



Dec. 13th. 2019

어제는 마미와 한식당에서 김밥, 떡볶이를 먹었다. 나야 한국사람이니 한국 음식이 그리운거야 당연한 일인데 마미는 일본인임에도 한국 음식, 특히 떡볶이가 먹고 싶다기에 함께 저녁을 하기로 했다.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 내가 자신에게 말을 먼저 걸어줘서 너무 고맙다는거다. 일본인에게 거부감이 있는 한국인도 있을테니 자신이 먼저 말을 걸면 불쾌해 할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고 했다. 정말 정색하고 대답해주었다. 한국인이 정색하는건 아베 총리의 정치색과 역사적 사건이지 일본인을 싫어하는게 아니라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없다고. 오랜만에 정말 정색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2. 자신은 겉은 웃고 잇지만 속은 어둡다고 말했다. 보통의 일본인은 정말 복잡해서 자신도 그런 것 같다고 했는데, 사실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았다. 뭐 한국인도 그런 사람 꽤나 있으니까.


3. 마미에게 피부 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태어나서 두 번째로 받았다. 그러면서 한국 화장품에 대한 찬양도 한참 들었다. 근데 내가 그 정도로 피부가 좋은건지는 정말 모르겠는데... (어쨌든 마스크팩 만세)


4. 마미는 세븐틴, 그 중에서도 조슈아를 좋아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멤버들이 어떻게 불리는지 애칭을 하나 하나 설명했다. 근데 여기서 놀라운 건 내가 세븐틴 멤버 이름을 다 안다는 거다. 캐럿(세븐틴 팬덤 이름) 아니냐는 소리를 한참이나 들었다. 응 아니야.



Dec. 14th. 2019

골웨이 투어 중, 출발할 때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도착하니 바람은 많이 불어도 다행히 해가 얼굴을 들었다. Lucky! 슬로우모션을 걸지 않아도 슬로우로 보이는 놀라운 모허절벽 광경! 자연은 위대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내려가다가 랜덤으로 눈을 마주친 언니가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먼저 나섰다. 고마운 마음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선 헤어졌는데, 다음엔 카메라 들고 다니는 언니한테 사진 한 번 더 찍어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도 오늘은 화장을 해서 그나마 사람처럼 보이니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스에서 바라본 더블린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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