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을 읽다가
낮이 길어지고, 아침 공기에도 묘한 끈적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온은 어느새 여름을 말하고 있고, 거리는 반소매, 짧은 바지 옷차림으로 변해간다. 여름휴가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다시금 몸을 다잡는다. 헬스장 러닝머신 위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이 줄지어 선다. 각자의 목표를 가슴에 품고, 무표정한 얼굴로 달리는 사람들. 바람도, 풍경도, 종착지도 없는 공간, 러닝머신은 움직이지만 계속해서 제자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기계 위에 자발적으로 오른다.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어떤 이는 편안하게 속도를 즐기며 자신만의 속도로 힘듦을 견뎌낸다.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 이평범한 운동기는 원래 고문도구였다. 19세기 영국 '트리드밀'이라 불리던 이 기계는 죄수들을 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곡물을 빻는다는 명목 아래 만들어졌지만, 곧 기능은 사라지고 형벌만 남았다. 수감자들은 하루 여섯 시간, 칸막이로 나뉜 좁은 공간에서 말도 없이 발을 굴러야 했다. 지루하고, 단조롭고, 끝도 없는 반복! 고통은 신체보다 먼저 정신을 마모시켰다. 진짜 끔찍했던 건, 그 고통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같은 구조의 기계 위에 스스로 올라선다. 살을 빼기 위해, 건강을 위해, 혹은 마음 한구석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차이는 단 하나 고통시작이 누구의 선택인가이다.
러닝 머신은 여전히 지루하고 여전히 힘겹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우리는 알고 있다. 원할 때 멈출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달릴지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데려간다는 것.
같은 행위라도, 의미와 통제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은 벌이지만, 내가 선택한 고통은 성장이 된다. 험한 산을 오르는 일,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 새벽같이 일어나 글을 쓰는 일,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버틸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더 나아갈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듯 하지만 제자리걸음 같고, 땀을 흘리지만 결과가 보이지 않을 것 같을 때, 그 고통이 내가 선택한 고통이라면 결국 믿게 된다. 이 길의 끝 어딘가에서, 분명히 나는 더 탄력적인 모습으로 있을 거라는 것을. 그러니 묻고 싶다. 왜, 오늘도 러닝머신 위에 오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