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몰라도 내 앞에서 부부 싸움하는 건 절대 못 본다.” 시어머니께서 합가 할 때 선언했던 말씀이었다. 어른들 앞에서 절대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네! 알겠어요 어머니” 호기롭게 말씀드렸던 나는 단 며칠 만에 나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7개월 아기를 데리고 무작정 순응하며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긍정회로를 돌렸던 나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솔직히 외면했지만 불화의 시작은 합가 하기 전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시댁에 들어오기 전, 29살이었던 남편은 산후조리가 끝나고 엄마 역할을 어떻게든 해내려고 애쓰는 나에게 2장 빼곡히 담긴 편지를 건넸다. 그 내용의 요지는 20대를 기념하는 이별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감정을 상기하다 보면 항상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가슴 위치에 지퍼로 여닫을 수 있는 임부복 원피스를 입고 머리카락은 한 움큼 빠져 더욱 볼품없었던 내 행색. 그리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나의 눈빛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게 젖 냄새가 가득해서 세상 누구보다 무해하고 빛나는 아들의 눈빛. 남편의 20대 이별여행(?)을 보내고 창살과도 같은 베란다 너머 밖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남편에게 제정신이냐고 아홉 수가 이길 것 같냐 산후우울증이 이길 것 같냐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냐며 악다구니를 썼다면 지금보다 조금은 덜 억울했을까? 그땐 왜 나의 복잡하고 힘들었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는지. 나도 남편처럼 정성스러운 편지를 써서 자유부인이나 해볼 걸 그랬나 생각해 보지만 나는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걸 안다. 어떻게 해서든 모유 수유 먹이겠다고 젖몸살에 울부짖어도, 밤마다 울어대는 영아 산통에 나보다 아들의 수면 부족을 걱정했던 나였다. 그런 나와는 참 다르게 남편은 ‘본인’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철없는 남편을 뭘 믿고 시댁에 들어가겠다는 용기를 낸 건지...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이런 남편과 애를 낳고 거기다 시댁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했으니... 어찌 보면 남편보다 더 철이 없었던 나를 탓해야 했나 보다. 이제야 말하지만 ‘남편아, 아홉 수보다 산후우울증이 더 세거든?'
시댁에 산다는 것은 곧 그의 오래 묵혀둔 영역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20대 끝자락에서 허니문 베이비를 탄생시킨 남편은 합가를 하고 나서도 젊음의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다. 사회생활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 막 취업해서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친구들, 연애를 시작하거나 신혼을 즐기고 있는 친구들 중에 자식을 낳은 친구는 남편이 거의 유일했다. 앞 날이 창창한 주변 친구들의 생활에 맞추려고 하니 너무도 제약을 많았으리라. 주말만 되면 그의 엉덩이는 날뛰는 망아지 마냥 들썩들썩 꺼렸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다 보이는데 그 꼴을 모르는 척하고 있으려니 나도 죽을 맛이었다. ‘너는 그래도 시댁이 익숙하잖아. 나는 생판 모르는 곳에서... 그것도 시부모님과 함께 어떻게든 적응하려는 나를 두고 혼자 놀러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드니?’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시댁의 위치는 남편이 초등학교 때부터 결혼 전까지 살아왔던 남편의 일생이 녹아든 곳이었고 이 환경이 부부 싸움이 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을 합가 하자마자 바로 깨달았고, 이제 와서 후회한들 되돌릴 수도 없으니 죽을 맛이었다.
분가 전까지는 집이 안식처가 될 수 없겠구나
시댁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주말 저녁에 구청에서 큰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까지 나온다니.. 너무 가고 싶었다. 남편에게 꼭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한 후 남편의 눈치를 보며 유모차를 끌고 걸어가는데 남편은 걸어가면서도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못 볼 것이고 저녁 약속이 원래 있었으니 콘서트를 가긴 가는데 중간에 나와야 할 것 같다며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소리만 해댔다. 그 모습에 너무 서운해서 가기 싫으면 가지 말고 친구 만나러 가라고! 나는 아들과 함께 보러 가겠다고! 유모차를 끌고 걸어갔다. 남편은 역시나 따라오지 않고 바로 친구들 만나러 갔던 것이다. 나랑 아들을 버리고 친구를 선택했단 말이지? 기가 막히고 서럽기까지 했다. 이런 기분에 콘서트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남편이 아니면 아예 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낯선 이곳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이 상황이 날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목적지 없이 걷다가 근처 벤치에 앉아 유모차를 세워놓고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나 이제 어떡하지?’ 남편이랑 같이 나갔는데 혼자 들어가면 시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대충 얼버무렸다고 치더라도 꼴도 보기 싫은 남편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이 감정으로는 도저히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언제 들어갈 수 있을까? 앞으로 분가할 때까지는 나의 안식처는 집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니 앞날이 그렇게 캄캄할 수가 없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집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시어머니께서 남편은 어디 있냐고 물으셨다. “애 아빠는 친구 만나고 들어온대요.”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콘서트는 봤니?” “… 아니요. 친구 만나고 오라고 하고 저는 근처 공원 산책하고 구경하다가 왔어요.” 같이 살게 되니 서로 너무 속속들이 알게 된다. 이것 또한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부부 싸움을 직접 목격하지 않게 할 순 있어도 부부 싸움을 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는 없다는 걸. 시어머니께서는 조용히 남편에게 전화해서 지금 당장 들어오지 않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며 강한 경고를 날리고는 철없는 아들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하셨는지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때의 나에게 토닥토닥
남편의 잘못을 노여워하시는 시어머니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면서도 맞장구를 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아들을 재우느라 불이 꺼진 고요한 거실에서 잠든 아들을 토닥이고 있는 나에게 시어머니께서 넌지시 말씀하셨다. 정신 나간 아들을 대신해서 사과한다고.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면 지금처럼 나한테 얘기하고 풀라고. 그 말이 위로가 되고 감정이 누그러짐을 느꼈다. 어머님의 위로와 함께 낯선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이었기에 흐지부지 흘러가다가 그렇게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다. 첫 단추가 중요하다고 그날 이후로 시부모님 눈치 보느라 비슷한 문제로 다양한 다툼을 들키지 않으려 조곤조곤 조용히 서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은 시댁에서 원만히 살기 위한 아들과 며느리 역할로서의 규칙을 정하고, 또한 우리도 부모였기에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 부모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한 노력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맞춰 나갔어야 했다. 그 본질을 보지 못한 채 눈앞에 보인 문제만 놓고 서로를 탓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고 상처를 주고받았던 것일까. 그리고 시부모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에만 몰두한 채 정작 나를 돌아보지 못한 그때의 나를 후회한다. 시부모님과 함께 산다고 나를 무조건 죽이는 게 해답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참 가엽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 말
불이 꺼진 거실 어머니와 단둘이 있던 그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지난번에 부부 싸움은 절대 보여드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못 지킬 것 같아요. 오늘 겪어보니 남편과 잘 살려면 시행착오는 불가피할 것 같아요. 남편도 아빠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고 저 또한 새로운 이곳에서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적응해 나가며 살아야 하잖아요. 때때로 서로 의견이 안 맞거나 분위기가 어둡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대신 어머님 아버님 앞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도록 할게요. 기다려주시면 분명 저희 잘 맞춰 나갈 거예요.”